"한두 번은 온 것 같아. 그땐 그런 자리 올라가기 전이었으니 우리 집에 오는 학생들하고 아무런 차이가 없었어. 막걸리 한잔하고 이야기하다 갔겠지."
이모가 그를 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기억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마음이 닿았다는 말이다. 이모는 선하고 꾸밈없는 학생들을 보면 정을 낸다. 술값을 떼어먹든, 술 취해 베개에 오줌을 싸고, 쿵쿵거리다 방구들을 내려앉히든 모른 체한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해도 이모에게는 여전히 학생이고, 허리가 구부정해도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이모일 뿐이다.
이모와 학생들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저것 손댔지만 재미를 못 봤던 이모는 칼국수와 잡채, 부침개 등을 파는 식당을 반월당과 접한 염매시장에 연다. 손맛이 좋았던지 다문다문 오던 손님들은 이내 단골이 되었다. 단골 중에는 대학생들도 더러 끼어 있었다. 이모는 그들에게 몰래 담근 동동주로 곧잘 정을 내곤 했다.
여느 식당과 다를 바 없던 이모의 막걸릿집이 청춘의 끓는 피로 데워진 것은 이모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모가 식당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던 그 시절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의 발길질을 시작한 때다. 이로 인해 장삼이사의 대폿집이던 이모의 막걸릿집은 시대적인 어둠을 뚫으려는 대구지역 대학생들의 텃밭이 된다. 비록 소박한 주점이지만 그 텃밭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해방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모의 식당은 이름조차 바뀐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시대를 비틀어 '곡주사'로 부르고 있던 참이다. 이를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이어받아 '곡주사 할매집'이라고 종이에 써 붙인다. 곡주사(哭酒士)또는 곡주사(哭呪士)란 이름은 학생들이 가슴에 품은 유신독재의 아픔과 분노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때부터 이모는 자신의 이름인 '정옥순'을 지우고 '곡주사 이모'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5월, 이모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보름 남짓 고초를 겪는다. 곡주사에 출입하던 학생들이 잡혀온 걸 보고서야 왜 들어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경찰에 쫓기거나 어려운 학생들을 외면하지 않은 대가였다. 한편으로 학생들만큼이나 곡주사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경찰과 자주 부딪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이모는 '빨갱이 이모'가 되어 있었다. 빨갱이 이모 덕에 학생들은 곡주사에서 그 시대의 울분과 열망을 토해내고 저항의 난장을 펼쳤다.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다 취기가 오르면 숨 막히는 바깥의 억압을 조롱하듯 노래로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그런 노래와 이모의 설움이 겹친 탓일까.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로 시작하는 진주 난봉가는 이모가 지금도 읊조리는 노래 중 하나다.
이모는 학생들 곁에서 세상이 변하는 것을 지켜봤다. 학생들이 기뻐하면 같이 웃고, 눈물을 흘리면 함께 울었다. 이모는 지금도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다. 재작년 12월, 학생들이 연 팔순잔치 때는 동동주를 한 사발씩 돌리고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던 바람을 조금은 이뤘다. 엊그제는 한국방송(KBS)이 광복 7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자리에 나가 학생들을 만났다.
40년 가까이 곡주사 지킴이였던 이모. 이모는 정작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하지만 막걸리에 취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자식 같았던 학생이 먼저 이 세상을 등졌을 때다. 그리고 6년 전 오늘, 곡주사의 학생들처럼 기억되는 그가 떠난 날도 다르지 않았다. 봉하마을을 두 번 찾았을 때 말조차 건네지 못한 걸 후회했지만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하고 꾸밈없던 그 모습이 학생들과 꼭 같아."
박창원/톡톡지역문화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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