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화폐 없는 세상

유럽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그전에는 구리가 주성분인 접시 화폐를 사용했다. 무거웠다. 가벼운 것이라고 해도 4파운드(약 1.8㎏), 가장 큰 것은 무게가 43파운드(약 19.5㎏)에 달했다. 상인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상거래 활성화를 위해 금속 대신 지폐를 만들기로 했다. 1661년 스톡홀름은행은 유럽에서 처음 지폐를 발행했다.

350여 년이 흘렀다. 상황이 반전됐다. 스웨덴 정부가 이번에는 거꾸로 화폐 없애기에 앞장섰다. '화폐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당장 현금을 내고서는 버스조차 탈 수 없다. 버스요금 통을 노린 강도 사건 후 모든 대중 교통수단에서 현금을 받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교회에도 헌금함 대신 카드 리더가 설치됐다. 스웨덴의 6대 주요 은행 중 5곳은 아예 현금 취급을 중단했다.

스웨덴 국민들은 대환영이다. 우선 범죄율이 줄었다. 금융의 효율성은 높아졌고 강도 사건은 30년 래 최저를 기록했다. 현금을 들고 다닐 일 없으니 범죄를 당할 일 자체가 사라졌다.

스웨덴뿐 아니다. 같은 스칸디나비안 국가인 노르웨이는 2020년까지 화폐 없는 세상을 만들 계획이다. 노르웨이에서의 현금 거래 비중은 이미 5% 정도다. 노르웨이는 화폐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금융위기와 강도와 '검은돈'을 없애는 데 제격이라는 입장이다. 덴마크도 가세했다. 덴마크 정부는 상거래 시 아예 현금 거래를 금지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방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내년 1월부터 덴마크의 상인들은 현금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이미 지난해 더 이상 지폐와 동전을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이 지난해 처음 1인당 20장을 넘어섰다. 풀린 5만원권은 발행 즉시 사라진다. 지난해 말 기준 5만원권 환수율은 29.7%에 불과하다. 발행된 10장 중 3장만 은행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화폐는 유통 수단이 아닌 그냥 재화의 저장 수단일 뿐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화폐 없는 사회로 진화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 그리되면 기업 총수가 억울하다며 쪽지를 남기고 자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뇌물이 박카스 통에 담겼느니 쇼핑백에 담겼느니 시비할 일도 없다. '화폐 없는 세상'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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