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위대한 여인의 사랑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로 R. 슈만과 클라라 비크를 들 수 있다. 로베르트(이하 슈만)는 20세 때 법학을 포기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당대 최고 실력자 비크 교수 문하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피아노 수업의 부담과 과도한 연습의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작곡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 와중에 슈만은 비크 교수의 딸 클라라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6세 때 이미 독일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딸 클라라를 보호하기 위해 비크 교수는 슈만의 불분명한 미래를 이유로 결혼을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장인을 상대로 법정소송까지 하고서야 결국 만난 지 5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 슈만이 30세, 클라라가 20세 때였다. 그들이 결혼한 1840년 한 해 동안에만 138곡의 가곡을 작곡할 정도로 슈만은 왕성한 결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슈만의 정신병 때문에 결혼생활은 불과 16년 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슈만 사후 40년 동안 클라라는 브람스의 신사적인 짝사랑을 알면서도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작곡가로 살면서 남편 슈만과의 사랑을 지켰다.

또 다른 여인의 사랑이야기, 리스트의 딸 코지마가 바그너를 사랑한 이야기이다. 원래 리스트와 바그너는 친구였다. 리스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나 워낙 미남인데다 최고의 음악가로서 많은 여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다 보니 건전하지 못한 이성관계가 비일비재하였다. 코지마도 자신의 후원자 아내에게서 얻은 사생아였다.

그리고 바그너는 아내가 있었지만 성적 방황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다. 코지마를 만난 것은 리스트의 제자로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며, 코지마의 남편이었던 뷜로브가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결국 친구이자 장인인 리스트처럼 바그너도 유부녀였던 친구의 딸 코지마와 비이성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코지마의 헌신으로 바그너의 방랑기는 줄어들었고,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코지마가 바그너의 두 딸과 아들 지그프리드를 낳고 나서야 뷜로브와 코지마의 공식 이혼이 이루어지고 바그너와 코지마는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바그너 만 57세, 코지마 33세였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과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아들 지그프리트의 탄생을 기뻐하는 마음을 함께 담은 '지그프리트의 목가'를 만들었다. 이 곡을 코지마의 생일 이른 아침에 거실 계단에서 초연했고, 잠이 깨어 방문을 열고 나온 코지마를 감동하게 한 일은 매우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결혼 후에도 바그너의 여성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코지마는 남편의 여성들까지 관리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바그너가 살아있는 동안 그에 관한 말과 행동 심지어 잠꼬대까지 모든 기록을 남겨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 집필에 도움을 주었다. 또 남편 사후 47년을 더 살면서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와 남편의 음악적 유산이 보전되도록 직접 관리하였다. 이 축제는 지금도 바그너 일가의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철우/작곡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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