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개는 1만4천 년 전에 운명이 갈렸다. 99.9% 이상 DNA가 일치하는 이 녀석들을 갈라서게 한 건 가축으로의 '전향' 여부였다. 일찍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해 주인의 마음에 드는 법을 깨우친 개들은 인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황야에서의 고달픈 삶을 접을 수 있었다. 강아지만 보면 죽고 못 사는 펫 마니아들을 보면 이들의 애정관계가 인간이 개에게 퍼붓는 '일방적 관계' 같지만 실상 인간에 대한 개들의 사랑과 복종은 상상 이상의 차원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인간은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지만 상대적으로 더 고독해졌다. 그런 개의 속성과 고독한 현대인의 접점에서 애견산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로움 해소를 위한 소모품'으로 출발한 애견산업은 많은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기견 문제다.
인간과 개의 '파산'으로 발생하는 유기견은 매년 10만 마리로 추측된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까지 합치면 50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이놈들의 절반은 보호소 구석에서 쓸쓸히 병사하거나 안락사 주사에 몸을 맡긴 채 생을 마감한다.
개와 인간의 불화, 그 틈새에 유기견보호소가 있다. 버림받은 개들을 보호하고 재입양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10년 넘게 개와 인간의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있는 대구유사모(유기동물을 사랑하는 모임) 박영보(60) 대표를 만나봤다.
◆유기견 보호사업에 뛰어든 계기
"2000년 무렵이었죠. 큰애에게 대학교 앞에 방을 얻어주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어요. 한눈에도 버림받은 애였는데 눈빛이 정말 애처로웠어요. 며칠을 고민하다 다시 그곳에 가서 이틀을 찾아 헤맸어요. 결국 헛걸음을 하고 나서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하는 소명의식 같은 걸 느꼈어요."
박 대표는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애견보호소에 자원봉사자 등록을 했다. 유기견센터에 가서 청소하고 목욕시키고 밥을 주는 등 주말을 고스란히 개들에게 '헌납'했다. 덕분(?)에 가족들과의 외식, 손주 돌봐주기는 고스란히 뒷전으로 밀렸고 그 무렵 장만했던 MTB 자전거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용도를 잃어갔다.
그러던 2012년 한 동물보호단체가 운영 비리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대표는 처음에 순수한 봉사에서 시작했던 분인데 초심을 잃은 게 화근이었다. 그 과정에서 남아있던 동물들을 모두 보신탕 업자에게 팔아버릴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박 대표와 동물단체 회원들은 밤에 축사를 '급습'해 유기견들을 모두 구조해냈다.
부랴부랴 구조된 유기견들이 거처할 쉼터를 만들며 지금의 대구유사모가 결성되었고 박 대표도 봉사자에서 동물보호운동가로 변신했다.
◆거리로 내몰리는 '상근이' '산체'
세간에서 한국의 애견산업은 '상근이'와 '산체'에게 달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몇 년 전 TV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상근이가 국민견으로 인기를 모을 때 동물보호단체에서는 '몇 년 지나면 상근이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겠군' 하며 농담을 나눴다고 한다.
예상대로 많은 '상근이'들이 보호소 신세를 지거나 집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구조'수색'경호견인 그레이드 피레니즈종은 성견이 되면 50, 60㎏이 나가고 힘이 세서 성인 남성들도 컨트롤하기 힘들다. 집에 마당이 없으면 사육이 거의 불가능하다. TV에서 어릴 적 귀여운 모습만 보고 충동 구매했던 사람들이 성견이 되자 이놈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삼시세끼'에서 인기를 끌었던 산체(장모 치와와종)도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다. 컵도그(Cup Dog)로 불릴 만큼 작고 귀여운 종인 이 녀석은 한때 몸값이 수백만원(순종의 경우)까지 뛰었다. "TV 속 앙증맞은 산체가 다 자라면 몸집이 세배로 커져요. 사료 스무 알을 먹던 놈이 1년 만에 4, 5㎏ '거구'가 되는 거죠. 그때쯤 TV 속 산체의 신비감은 다 날아가 버려요. 거기에 치와와종의 털 빠짐은 상상을 초월해요. 1년 내내 롤러를 손에 쥐고 살아야 할 정도입니다." 개를 분양 받을 때는 이런 단점까지 다 끌어안을 각오가 돼 있을 때 결정을 해야 한다고 박 대표는 강조한다. 그나저나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은 2, 3년 후 거리로 쏟아져 나올 산체들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학대받고 버려지는 애완견들
몇 년 전 방송에서 개 학대에 대한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이웃집 남성이 개에게 흉기를 휘둘러 두개골 파손, 척추장애를 안겼던 사건이다. 생명의 위협을 당한 그 개의 '죄목'은 옷을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쉼터 유기견들에게도 갖가지 사연들이 있다. 장롱 속에 버려졌던 강아지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기도 하고(박스기사 참조) 보신탕집에 팔려가기 직전의 개들을 구조해온 적도 있다. 그중에서 박 대표의 기억에 남는 녀석은 '달이'이다.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놈은 2년 새 5번이나 입양, 파양을 거듭했어요. 쉼터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입양돼서는 배변훈련이 안 되고 무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아요. 1년에 몇 번씩 '소박'을 맞고 쉼터 신세를 졌어요. 개들이 입양, 파양 때 겪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해요. 한 번 버림받은 애들은 몇 달씩 우울증을 앓거든요." 달이를 마지막으로 파양한 분도 버릇을 들인다고 학대를 했던 사람인데 달이는 지금도 '버려진 그 자리'에서 매일 주인을 기다린다고 한다. 박 대표는 애완견을 입양할 때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나 개의 약점까지 감수한다는 각오가 섰을 때 결정을 하라고 조언한다.
10년 넘게 유기견들의 대모 역할을 해온 박 대표. 그동안 입양시킨 유기견들만 1천여 마리에 이른다. 그동안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동물자유연대'의 후원 사업에 채택돼 '동물치료비'를 지원받게 됐다. 개인적인 봉사 활동이 사회 기관의 인정도 받게 되어 자부심이 더 커졌다.
박 대표는 매일 10시에 쉼터로 나와 오후 3시까지 '애'들을 돌본다. 50마리 강아지들을 씻기고, 먹이고, 깎이는 게 그녀의 일과다. 오후에 잠시 집에 들어가 가사를 돌보고 저녁에 다시 나와 밥을 챙기고 잠자리를 돌본다.
정부 지원이 전혀 없어 살림살이도 빠듯하다. 강아지를 입양할 때 보호비로 받는 약간의 '책임비'와 자원봉사자들이 후원금으로 내는 '대부모(代父母)비'가 수입의 전부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염치가 없지만 특히 손자들을 볼 때 제일 마음이 아프다. 가족 외식 약속을 잡아 놓고 가축병원으로 줄행랑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만능 스포츠우먼이었던 그는 60대 초로의 할머니가 되었다. 몸 생각 안 하고 개들을 보살피다 보니 그동안 건강도 많이 상했다. 최근에 척추 시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건강 탓에 문을 닫을까 몇 번이나 고민도 했지만 최근 조력자로 나선 남편과 주위에서 헌신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차게 케이지(Cage)의 문을 열어젖힌다. '반려견, 사지 마세요. 입양하세요.' 포스터가 그녀의 등 뒤로 오버랩된다.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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