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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시와함께] 길에 관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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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1959~ )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메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고 나면 언제나 암호가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

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부분.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민음사. 1988)

벤야민은 걷는 사람만이 길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자동차를 타고 가거나, 지도를 보는 사람에게 길은 오직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시에서처럼 그 기호와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시인은 걷는 자이다. 천천히 길을 가다가 아무 데서나 길에서 내려, 길가에 피어 있는 풀들과 나무와 개울과 지친 사람들을 '본다'.

길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다. 길은 이곳에는 없는 새로운 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길은 우리가 가는 한에 있어서의 길이다. 가지 않은 길은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장소,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곳은 우리가 꿈꾸기 위한 장소이지 우리 삶, 정치의 자리는 아니다.

길은 정치다. 길로서의 정치의 속력과 사람의 속력은 같아야 한다. 길의 속력이 더 빠른 '변혁'만으로는 폐허만이 남고, 사람의 속력이 더 빠른 '해방'만으로는 환멸만이 남는다는 것을 지난 세기는 충분히 보여 주었다. 둘 다의 속력은 비슷한 것이어야 한다. 줄지어 가는 인민주의적 방식이나 파시즘적 방식으로도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길 위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길은 우리에게 더 뜨거운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표현처럼 "얼마나 뜨거워야 (우리의)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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