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영원한 것 어디 있으랴, 뒷모습 아름답게 물러나세∼

범중엄.
범중엄.

앞사람이 갈던 땅을 뒷사람이 갈아먹네

범중엄

한 줄기 푸른 산의 경치가 참 그윽한데

앞사람 갈던 땅을 뒷사람이 갈아먹네

뒷사람아, 그렇다고 기뻐하진 마시게나

그대 다음 밭 갈 사람 뒤에 기다리고 있네

一派靑山景色幽(일파청산경색유)

前人田地後人收(전인전지후인수)

後人收得休歡喜(후인수득휴환희)

還有收入在後頭(환유수입재후두)

*원제: [書扇示門人(서선시문인)-부채에 적어 제자에게 보임]

*范仲淹(898~1052):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재상.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과거 오랫동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던 조병화의 '의자'다.

그렇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는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앞사람으로부터 물려받아 잠시 이렇게 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영원토록 내 것일 수도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데, 영원토록 내 것이 어디 있으랴. 앞사람으로부터 잠시 빌려서 사용하다가, 그다음 사람에게 아무런 미련 없이 물려주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핫바지에 방귀가 새어나가듯이, 어느 날 문득 '슬그머니' 말이다.

범중엄이 지은 위의 작품도 조병화의 '의자'와 버전이 같다. 농부가 농사를 짓고 있는 땅도 '의자'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농부는 누구나 앞사람이 갈아먹다가 자기에게 물려준 땅 위에서 갈아먹으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갈아먹고 살다가 뒷사람에게 물려주고 떠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 뒷사람도 자기보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갈아먹던 땅을 물려주고 슬며시 떠나가기 마련이니까. 그러고 보면 현재 땅문서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여 기뻐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얼마 후면 그 땅을 다시 물려주고, 핫바지에 방귀가 새어 나가듯이 슬며시 떠나가게 되어 있는 것을!

이왕 물려줘야 하는 것이라면 너무 오랫동안 질질 끌지 말고 아쉽더라도 조금 일찍 물려줄 것. 이왕 물려줘야 하는 것이라면 엉망진창으로 물려주지 말고 물려받을 때보다 더 좋은 상태로 물려줄 것. 이왕 물려줘야 하는 것이라면,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듯 허심탄회하게 물려줄 것. 이왕이면 뜨거운 박수 받으며 뒷모습이 아름답게 물러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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