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얼굴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는 렘브란트(1606~1669)로 알려져 있다. 평생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 그림 속엔 부와 명성을 쌓았던 20대 때부터 상처(喪妻) 슬픔에 잠겼던 50대 비극까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단 한 줄도 자전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미술사가들은 그 그림 속에서 대하소설보다 많은 전기(傳記)를 읽어냈다.
최근 한국 화단에 갑자기 '얼굴'이 화두로 떠올랐다. 권순철(72) 화백의 '시선'(視線)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전시에서 수백 개의 얼굴을 등장시키고 있다. 서울 탑골공원의 노인, 어촌의 촌로부터 예수의 성상(聖像)까지. 누구는 한민족의 자화상이라고 하고 어느 평론가는 우리 민족의 DNA라고도 논평했다. 권순철 화백의 '얼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
◆135개 작품으로 민족 자화상 형상화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대구미술관으로 향했다, 예술과 친하지 않았던 탓에 가는 발걸음이 자꾸만 어색했다. 한산한 회랑을 지나 2층 전시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주체성, 흔적, 풍토, 그리다'라는 네 주제의 작품과 만났다. 135점의 작품을 통해 권 화백의 화풍과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그렸다는 스케치, 중2 때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추상작, 얼굴, 넋 시리즈 등이 전시돼 있었다.
단순히 회화 위주로 구성되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조소(테라코타), 설치작업, 드로잉 등 여러 장르가 망라돼 있었다. 몇몇 작품 앞에서는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어느 곳에선 옷깃을 추스르기도 했다.
전시장을 나서면서 감상을 정리해 봤다. '역사의식'이 마지막 생각으로 남았다. 실제 작품에는 고서(古書) 한 점, 와당 하나 등장하지 않지만 작가는 작품 속에 주제를 은닉해놓고 있었다. 135개 퍼즐이 합쳐져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완성했다는 느낌, 그런 소감이었다.
◆한국인의 얼굴 형상화에 40년 매달려
얼굴엔 200여 개의 안면 근육이 있고 이것들이 모여 표정을 만들고 감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권 화백은 군대에 갔다 온 20대 후반에 '우리 것'에 눈을 뜨고 한국인 얼굴 형상화 작업에 매달려 왔다.
40년 동안 얼굴에 천착해온 이유,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제일 먼저 이 질문을 던졌다.
"단지 얼굴의 열거, 나열만으로 주제를 완성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의 작업은 '두 가지 얼굴'에 매달려 왔습니다. 첫째 인물을 통해 역사적 자화상을 완성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해부학적, 인류생태학적으로 한국인의 고유한 얼굴을 형상화하는 일이었습니다."
권 화백이 이 얼굴의 구체적 표현 수단으로 촌로, 시장의 상인, 민초를 택한 건 그의 의식 뿌리가 민중과 민족 개념에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시장, 역전, 대합실, 병원을 찾아다녔다. 거기서 많은 노인을 만났고 스케치를 거쳐 화폭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현대사 격변기를 거친 노인들의 얼굴은 권 화백 화첩의 장(章)과 단락이 되어 역사 대하극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6'25전쟁 때 가족 잃고 현대사 아픔 화폭에
1944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권 화백은 7세 때 6'25전쟁을 겪었다. 그 전쟁에서 아버지와 삼촌을 잃었다. 그가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 이토록 집중한 데에는 이런 트라우마가 작용했던 결과였다. 1960년 경북고를 거쳐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권 화백은 1989년 프랑스행을 결심했다. "군 제대 후 한때 제가 해오던 작업에 회의가 일었습니다. 미대 뒤뜰에서 작품 수십 점을 불태운 적도 있어요. 이렇게 마음속 내상(內傷)을 털어내니 보다 큰 세상에 나가서 나를 검증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붓칠과 미술적 영감은 프랑스에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도불(渡佛)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객관적으로 검증받겠다는 신념에 따라 선택한 파리행이었지만 그의 작업은 '서양 거장 따라하기'나 '화풍 베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 정착 이후 한국의 원형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역사의식에 더 몰입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신문화에 몰입하며 '얼굴과 넋과 산'이라는 화두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야수파적 거친 붓 터치로 '얼굴' 완성
권 화백의 그림을 말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민중화가 이력이다. 그는 한때 김용태, 오윤, 황재형 임옥상과 같이 활동했고 걸개그림, 포스터로 대표되는 현실 참여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작가는 작품으로, 예술로 모든 걸 말할 뿐이며 사상이나 이념성을 띠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실제로 작품 중 정치성을 띤 그림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 속에 은유 된 민중성은 어떤 정치구호나 이념을 뛰어넘어 관람객들에게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권 화백의 화풍을 말할 때 야수파적 거친 붓 터치도 화제로 떠오른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프랑수아즈 모냉도 "권순철의 캔버스에서 반 고흐와 장 포트리에를 만날 수 있다"고 평론한 바 있다. 이런 화풍은 얼굴 시리즈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보통은 붓으로 칠을 하지만 질감이 성에 차지 않으면 캔버스 나이프로 물감을 퍼 올려 짓이기기도 한다. 이런 거친 붓질을 통해 민중들의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일이 가능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의 넋, 정신이 작품에 깃들게 된 것이다.
◆'자화상'에서 한 인간과 만나다
2층 전시실 한쪽에 그의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다. 까칠한 표정과 도발적 눈빛으로 세상과 맞서려 했던 20대 청년이 있고, 가르마를 타고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중년의 화가가 있다. 날 선 눈빛은 세상을 관조하는 순한 눈빛으로 바뀌면서 마지막 70대 칸이 끝난다. 거기엔 한 노 화가의 순탄치 않은 삶의 이력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6'25전쟁, 해방정국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왔던 민초의 고단한 흔적이 묻어 있었다.
네덜란드 국민이 렘브란트 자화상에서 한 화가의 생애와 사조(思潮)를 읽었듯 한국의 관람객들도 권 화백의 '얼굴 시리즈'에서 한국 역사의 거친 '질감'(質感)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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