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그러하듯, 처음 하는 것은, 첫 무대'첫 시합은 대부분 결과가 신통치 않다. 어쩌다 처음이 좋다해도 이내 고꾸라진다. 오죽했으면 약삭빠른 노름꾼들조차 "초반 끗발은 ×끗발"이라 하지 않는가.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까지 올려놓은 신화적 존재 거스 히딩크. 2001년 1월 우리 대표팀 감독을 맡은 그는 부임 첫해 내내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2001년 5월 30일 프랑스와 맞붙었다가 0대 5로 대패를 당했다. 앙리, 트레제게, 지단 등 프랑스의 스타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0대 5로 졌기에 비난 여론은 더 거셌다. 그해 8월엔 체코에 0대 5로 대패했다. 확실한 '오대영' 감독이 됐다. 감독 데뷔 첫해는 이처럼 호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공의 크기를 좀 줄여보면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선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1994년 말 삼성에 입단할 때 장래가 촉망받는 투수였다. 삼성에 입단할 당시 "투수로서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겠다"는 각오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 1군 무대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투수로서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팔꿈치 부상을 입은 이유도 있었지만 팀의 전략도 작용했다.
당시 1루수를 맡고 있던 양준혁 MBC 해설위원의 회고를 들어보니 양준혁은 1루수로서 잦은 악송구를 내는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고 자신이 외야수로 가기 위해 새로운 1루수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투수로 입단한 이승엽이 1루를 맡을 타자로 낙점됐다는 것. 고교 때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승엽은 결국 전지훈련장에서 투수가 아닌 타자로 변신해야 했다. 입단 첫해 겪은 시련이었다.
삼성 얘기를 계속해보자. 글로벌 기업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의 첫 사업은 오늘의 삼성그룹으로 이어진 대구 삼성상회가 아니었다.
경남 의령이 고향인 그는 부농이었던 선친으로부터 받은 300석지기 농토를 모두 현금화한 뒤 마산에서 첫 사업을 시작한다. 1936년이었다.
그해 봄 호암은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차리고 도정업에 도전했다. 호암은 순식간에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내친김에 운수업에까지 손을 댔다.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토지 투자였다. 은행 융자를 받아 시작한 토지 투자 사업은 시작한 지 1년 만에 덩치가 커져 호암은 순식간에 660만㎡(200만 평)를 가진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사업 시작 1년 만인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다. 토지 가격이 폭락하고 은행 대출 회수가 시작됐다. 은행 빚은 무서웠다. 은행 빚 독촉에 호암은 정미소'운수회사를 모두 팔아치워야 했다. 사업 데뷔 무대는 대실패였다.
연예인들도 데뷔 무대가 혹독하긴 마찬가지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대중문화를 움켜잡았던 서태지는 1992년 데뷔 무대였던 한 방송사 연예프로그램에서 '난 알아요'를 불렀다. 평가는 악평 일색이었다. 평론가들의 평가 점수는 10점 만점에 7.8점에 머물렀다.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평가 점수로는 역대 가장 낮은 것이었다. 이후 180만 장이라는 우리나라 가요계 데뷔 앨범으로는 최대 판매량을 쏘아 올리는 서태지 '난 알아요'의 첫 출발은 이렇게 참혹했다.
갑자기 여러 사람들의 데뷔 무대, 첫 출발을 떠올린 이유는 최근 경북을 다녀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보고서다. 지난달 말 그가 우리 지역에서 밟은 무대 위에는 화려한 조명이 쏟아졌디. 조명에 맞게 그는 각 무대별로 색깔을 맞춘 말풍선을 날리며 주목을 이끌어냈다. 이쯤되면 쾌조의 출발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좋은 출발을 보이며 '큰 꿈'을 꾸던 사람들 중 꿈을 현실로 이룬 이는 드물었다. 반 총장과 자주 비교되는 고건 전 총리를 비롯해 정운찬 전 총리'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 등이 그랬다.
엘리트 외교관 출신으로 대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커진 반 총장. 그의 첫 무대처럼 승승장구라는 단어만이 그를 따라다니지는 않을 터. 곧 시련이 첫마디를 걸어올 것이다. 시련을 이기는 기술, 그는 과연 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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