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주민들이 즐겨 먹던 향토 음식 '꼬막'이 전국적으로 뜨거운 명성을 얻은 것은 순전히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 덕택이다. 태백산맥은 한국전쟁 이후 남도의 작은 소도시로 비껴나 있던 벌교를 중심으로 한 보성, 순천 지역을 끄집어내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작품은 남도 지역을 배경으로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치열했던 이념 대립과 우리 민족의 통한의 역사를 긴 호흡으로, 하지만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소설에는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 무당 소화 등을 비롯해 모두 270여 명이라는 방대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실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개성이 뚜렷하다. 이 책이 주목받은 것은 우리 문학사에 분단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문학사적 의의를 빼고서라도 그의 문장은 보성 인근 여자만(순천만)과 득량만을 가득 채운 갯벌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흡입력을 가졌다.
빨치산을 다뤘다는 줄거리의 강렬함 외에도 전라도 특유의 풍경과 맛을 짙은 사투리로 감칠맛 있게 묘사해 낸 표현력은 도저히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뻘밭에서 평생 허리 굽혀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민중의 삶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노을처럼 붉게, 시리도록 아프게 가슴에 사무친다. 그렇다고 뻘을 깊은 수렁으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갯벌은 생명의 땅이다. 짧은 근대기 동안 식민지와 전쟁 등 수많은 굴곡진 역사를 이겨내고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일궈낸 힘이 바로 이런 질기고 강한 민중의 생명력에 바탕했을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을 한 번 더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꼬막 맛에 대한 묘사다. 그는 꼬막의 맛에 대해 '간간하고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까지 한 맛'이라고 썼다. 평생 꼬막 맛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꼴깍 침이 넘어가며 그 맛을 찾아나서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문장력이다. 이렇게 '보성'은 조정래로 인해 새롭게 조명됐다.
◆문학 기행 1번지, 벌교
봄날, 소설 속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아 전라남도 보성으로 향했다. 문학 기행의 1번지로 불리는 벌교 땅이다. 벌교 읍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물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는 2층 건물 '보성여관'이다. 소설 속에서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현 부자 집' 소유이자 벌교 유일의 여관이다.
실제 1935년 문을 연 보성여관은 1988년까지 영업하다 학교정화구역으로 문을 닫은 뒤 상점 등으로 사용됐지만,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현재는 카페 겸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소개되면서 한층 더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보성여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격자무늬로 잘게 쪼개진 나무 창가에 자리 잡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화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홍매화의 짙은 분홍빛이 봄기운을 한가득 뿜어낸다. 카페에서 보성의 명물인 녹차 한 잔을 주문한 뒤 뒷문을 열고 나가 햇살 가득 내려앉은 툇마루에 자리 잡았다. 뒤편 숙박동은 7개의 방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한껏 물이 올라 봉오리를 터뜨리기 직전인 목련과, 겨울 찬바람을 이겨내고 봄소식을 가져온 분홍 동백꽃, 그리고 기와 끝 고고하게 자리 잡고 노래하는 새의 울음소리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담긴다.
2층은 다다미방이다.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나무 바닥이 정겹다. 창밖으로 내다보면 소설 속 토벌군의 집합 장소였던 '남국민학교'(현 벌교남초등학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인근에는 1919년에 건축된 옛 벌교금융조합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소화다리(부용교), 18세기 건축물로 포구를 가로지르는 무지개 모양의 횡갯다리(홍교보물 제304호) 등을 돌아볼 수 있다.
◆태백산맥문학관
다리를 건너 태백산맥문학관으로 향했다. 이 건물은 방향이 특이하다. 으레 건축물은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남향 혹은 동향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건물은 북향이다.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시대정신인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한다.
문학관 내부에는 4년간 꼼꼼한 취재로 작품을 준비하고 1983년 연재를 시작해 6년 동안 써내려갔던 작가 조정래와 태백산맥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친필 초고다. 유리 안에 1만6천500장에 달하는 원고지가 2m 높이로 쌓여 있다. 태백산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서편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그 외에도 문학관에는 그가 직접 취재한 자료, 사용했던 필기구, 입었던 옷가지, 가족과 애독자들의 필사본, 심지어 이적성 시비로 두 번의 재판을 거쳐야 했던 작가가 쓴 유서까지 600점 넘게 전시돼 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작가가 인세를 받기 위해 사용했던 도장이었다. 예전에는 책마다 인세를 받기 위해 붉은 인주가 찍힌 작가의 도장을 일일이 풀로 붙였는데, 태백산맥은 인세 도장만 36개를 썼다고 한다. 단단한 도장이지만 너무 많이 사용하면 글씨가 문드러지다 보니 약 200만 권마다 새롭게 도장을 교체한 것이다. 이 책이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다.
태백산맥문학관을 나오면 바로 왼편 모퉁이에 작은 기와집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무당 '소화'가 살았던 집으로, 남로당 조직의 밀명을 받아 활동 거점 마련에 나선 정하섭이 소화와 이 집 신당에서 애틋한 사랑을 시작했다. 소화 집 옆으로는 솟을대문 위에 2층 누각을 얹어 한옥과 일본식이 섞인 '현 부자 집'이 여전히 위용을 자랑한다. 중도 들녘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2층 누각을 얹은 것으로, 우리의 아픈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되새기게 만드는 구조다.
◆봄철 기운 북돋워주는 쫄깃쫄깃 꼬막
벌교 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꼬막'이다. 태백산맥을 읽는 내내 가슴 아픈 역사적 비극에도 불구하고 입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은 순전히 꼬막 때문이다.
'꼬막'은 전라도 방언이다. 소설 태백산맥이 출간될 당시 표준어는 '고막'이었다. 표준어를 쓰자는 출판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작가는 사투리인 '꼬막'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뚝심(?)에 힘입어 급기야 '꼬막'이 표준어의 지위를 꿰차면서 이젠 누구나 '꼬막'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부른다. 벌교읍내에는 꼬막 한정식 집만 수십 곳이다. 전라도 특유의 맛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을 찾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중 소설 속 '술도가'로 묘사된 '국일식당'을 찾았다. 1952년 문을 연 이 식당은 오랜 역사만큼 예전의 정겨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쿰쿰한 냄새와 긴 복도를 따라 칸칸이 자리 잡은 방의 낡은 모습이 오히려 반갑다. 대표 메뉴인 꼬막정식을 주문하자 삶은 통꼬막과, 꼬막전, 꼬막된장국, 꼬막무침을 중심으로 홍어, 생굴무침 등 20여 가지 진수성찬이 펼쳐진다.
꼬막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태백산맥에 묘사된, 벌교가 자랑하는 꼬막은 바로 '참꼬막'이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있는 조개 껍질의 꽁무니에 숟가락을 끼우고 비틀듯이 돌리면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같은 적고동색 살을 드러내는 것이 참꼬막이다. 특히 꼬막은 보약이다. 타우린 함량이 높아 봄철 나른해진 몸의 원기를 보충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참꼬막 맛보기가 쉽지 않다.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 그물로 끌어올려 수확하는 새꼬막이나, 양식이 쉬운 피꼬막과 달리 참꼬막은 갯벌 뻘배를 타고 채취해야 하는데 최근 갯벌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면서 참꼬막 물량이 부족하고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세계의 놀라운 풍경 31선에 선정된 녹차밭
예로부터 다향(茶鄕차의 고장)이라 불렸던 보성까지 와 푸르른 차밭 전경을 눈에 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보성은 삼국시대부터 녹차를 재배해 온 곳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CNN이 '세계의 놀라운 풍경 31선'에 이름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차나무는 고온다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데 득량만과 보성강을 낀 보성녹차밭 일대는 연평균 기온이 13℃, 강우량이 1천400㎜로 차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본래 차는 상록수로 사철 푸르름을 자랑한다. 하지만 올해 사정은 달랐다. 지난겨울, 워낙 전국적으로 이상 한파가 기승을 부린 탓에 차나무도 동해를 입어 담갈색으로 얼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축구장 1천400개' 크기 차밭에 굽이치는 물결 같은 기하학적 풍광만은 여전하다. 기온이 점점 따뜻해지면서 얼어붙어 말라버린 잎들을 털어내고, 잘라내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3월 하순경이면 예의 그 푸르른 녹차밭을 구경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전망이다.
작업 인부는 "지난겨울 보성의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떨어졌는데 이런 추위는 정말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며 "앞으로 기온이 얼마나 빠르게 상승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예년보다는 녹차 수확이 조금씩 늦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성녹차밭 입구의 짙은 삼나무 숲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길게 쭉쭉 뻗은 삼나무 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한 힐링을 즐긴 느낌이다. 삼나무숲 옆으로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깨끗한 시냇물이 봄이 시작됐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보성을 떠나기 전, 갯벌로 유명한 득량만의 낙조를 찾아나섰다. 득량만 방조제를 중심으로 왼쪽 땅은 보성 득량면이고, 오른쪽은 고흥군 대서면이다. 해가 넘어가는 방향을 따라 고흥 땅 장선노둣길에 서서 득량면을 바라봤다. 장선노둣길은 작은 섬까지 들어가 볼 수 있게 난 길로, 밀물 썰물에 따라 길이 드러났다 잠기길 반복한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장선노둣길에 서서히 바닷물이 차올라 다리를 잠식하고, 금빛으로 넘실대던 물결이 붉게 타오르며 일렁거려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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