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승명인, 타목(打木) 김종흥  

전통문화 지킴이, 안동 하회마을 목석원 주인장

장승명인 김종흥 씨가 하회탈 얼굴을 한 장승들 속에서 하회탈을 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 전문 모델 뺨치는 프로(?)의 끼가 엿보인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장승명인 김종흥 씨가 하회탈 얼굴을 한 장승들 속에서 하회탈을 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 전문 모델 뺨치는 프로(?)의 끼가 엿보인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안동 하회마을 목석원의 주인장 타목(打木) 김종흥 씨는 사진작가들에게 특히 유명하다. 장승 명인답게 장승을 깎는 동작이 역동적이며 예사롭지 않다. 주목할 만한 점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평소에는 잘하다가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색해지기 일쑤인데, 김 씨는 그 반대이다. 카메라가 오히려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할까. 어쨌든 그의 모습에선 못 말리는 '끼'가 확연히 엿보인다.

장승 명인 김 씨는 언제부터 유명인사(?)가 됐을까? 올해 6월 중순에도 태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타콘 축제에 참가했다. 명성이 세계적이란 뜻이다. 캐나다·호주 등 영연방국가들에선 특별히 귀빈 대접을 받는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생일 축하 건배'를 함께 한 사진이 유명세의 디딤돌이 되었다.

한 가지 궁금해진다. 김 씨가 장승 명인으로서 이름이 나 영국 여왕의 건배 파트너가 되었을까?, 아니면 영국 여왕의 건배 파트너가 되는 바람에 장승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까?

흔히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거나 노력해도 즐기는 자를 당할 수는 없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들 중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이 금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쩌면 타목 김종흥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김 씨로부터 '인생의 신비'를 들어보기 위해 하회마을 목석원을 찾았다.

▶ 노는 것이 특기인 아이

김 씨는 1953년 안동시 풍천면 중리에서 7남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님이 면사무소 공무원이 되면서 형편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중리에는 5일장이 섰다. 어린 김 씨의 끼를 발산할 '난장'이 자연스럽게 제공된 셈이다.

"어릴 때부터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끼가 본격적으로 발동했는데요. 장날마다 열리는 콩쿠르(노래자랑대회) 단골 입상자였고, 가설극장·쇼단·약장수·서커스 등 놀고 즐길 거리도 풍부했습니다. 요즘에는 범죄이지만 당시에는 난전의 물건을 훔쳐 먹는 것은 일종의 놀이였습니다. 한마디로 말썽꾸러기 골목대장이었죠."

김 씨는 손재주도 뛰어났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형님이 불국사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 사진이 담긴 필름을 집에 가져다 둔 것을 보고, 슬라이드 환등기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상영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그냥 '슬라이드에 전등을 비춰보니 화면으로 비치는 것'을 이용해, 거울과 건전지·전구를 짜맞추어 자체 제작했다. 썰매와 화약총(우산대 등을 이용하며 실제로 총알이 발사됨)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솔직히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습니다.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졸업사진까지 다 찍었는데, 그다음부터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놀 것만 확실히 다 챙겨 논 셈이죠."

담임 선생님이 친절하게 졸업장을 챙겨 집으로 가져다준 덕분에 김 씨의 최종학력은 초졸이 될 수 있었다.

▶이발도 예술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몇 달간 놀기만 했다. 마을장터에는 이발관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친척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친척은 "(종흥이를) 이발관으로 보내라. 손재주가 좋으니 기술을 배우면 먹고사는 걱정을 없을 것"이라면서 어머니를 설득했다. 이렇게 26년간의 이발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3년은 머리 감는 일만 했습니다. 여전히 놀기를 좋아했죠. 집에 있던 진공관 전축을 들고 친구들과 춤추면서 놀러 다녔습니다. 고고, 디스코, 림보, 트위스트 등 못 추는 춤이 없었고, 노래를 잘해 인기 짱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발소 일에는 성실했습니다. 새벽까지 놀면서도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이발관 주인이 2년간 아예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을 얻었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셨다.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했는데, 김 씨만 초교 졸업장뿐인 것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이었다. 형님이 면소재지에 이발관을 하나 지어주셨다. 150평 되는 터 한쪽에 이발관이 있고, 넓은 마당을 지나면 살림집이 있는 구조였다. 손재주가 많은 김 씨는 정원 꾸미기에 관심이 많았다. 마당 한가운데 연못과 물레방아를 만들고 분재로 장식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정원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성심 성의껏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영업시간 이후에 친구들을 모아 놓고 집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신나게 놀았지만, 그래도 그다음날 새벽에 나와 골목을 청소하고 이발소 일에 열중했죠. 저는 이발도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데(당시는 숯불에 고데기를 달구어 사용)와 드라이를 잘하면 며칠씩 머리를 감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김 씨의 장승 작품은 표정이 하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26년간 이발관을 운영하면서 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장승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내 삶을 살고 싶다

취미로 분재를 하다 보니 죽은 나무가 생겨났다. 그냥 버리자니 아깝고 안타까웠다. 그 나무의 본래 형상을 살려 인물·동물을 조각해 분재와 함께 전시했다. 안동공고 미술교사였던 고 주상찬 씨는 이웃주민이었다. 800년 전 안동하회탈을 복원하신 분이다.

"손재주가 있으니 하회탈이나 장승같은 것을 만들어 보시죠. 일제강점기와 새마 운동으로 인해 장승이 미신 취급받으며 뽑혀 나갔지만, 언젠가 '우리의 것'을 다시 귀하게 여기는 때가 올 것입니다."

주 선생은 이후 김 씨에게 장승과 하회탈 그림을 그려주고 조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주 선생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1년 정도밖에 지도를 받지 못했다. 이 때부터 '언젠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며 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비록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김 씨는 엄청난 짠돌이였다. 돈은 생기기만 하면 예금을 했다. 짠돌이 남편 탓에 부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발관과 함께 슈퍼마켓을 운영했고, 안동 시내에 집도 사고 땅도 샀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전통의 보전과 계승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회마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당시는 유명관광지가 아니었음). 주위에서 문전옥답 팔아 못 쓰는 땅 산다고 말렸지만, 하회마을 입구 계단 논 1천 평을 구입했습니다. 지금의 목석원 자리입니다. 1992년 하회마을로 옮기면서 하회탈춤 회원으로 가입했고, 여주 목아불교박물관의 박찬수 선생(인간문화재)을 찾아 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자가 되었습니다. 이왕 할 거 제대로 하자 싶었죠." (하회마을이 관광지로 차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김 씨가 이사 온 지 3년이 지난 1995년쯤이었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오른쪽)과 생일 축배잔을 들고 있는 김종흥 씨. 이 일을 께기로 김 씨는 일약 세계적 관심을 받는 인물로 부상했다. 김종흥 씨 제공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오른쪽)과 생일 축배잔을 들고 있는 김종흥 씨. 이 일을 께기로 김 씨는 일약 세계적 관심을 받는 인물로 부상했다. 김종흥 씨 제공

▶하늘이 길을 열어주다

장승을 향한 김 씨의 열정은 대단하고 무모(?)했다. 3년 만에 장승 108기를 만들어 목석원을 장승공원으로 만들었다. 이 소식은 1998년 매일신문을 통해 언론에 처음 실렸다. 장승공원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장승에 대한 수요도 조금씩 생겨났다.

천운(天運)도 내렸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한 것이다.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이날은 여왕의 73번째 생일이었다. 축하공연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펼쳐졌고, 생일상이 차려졌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한국인 5명이 초청되었다. 여기에 김 씨가 포함되었다. 게다가 김 씨가 여왕과 생일 축배를 함께 들 영광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하회별신굿 회원으로서 축하공연에 참가했고, 하회마을 주민이며, 여왕과 생일까지 같았기 때문이다.

마케팅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여왕의 생일 사진은 주목 받기에 충분했다. 꽁지머리, 한국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복장(사실은 공연 때 입은 승려복장), 예사롭지 않은 예술가적(?) 풍모……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기에 여왕과 감히 생일 축배를 들 수 있었을까?"

장승장이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치는 순간이었다. 연 10만 명 수준이던 하회마을 관광객은 120만 명까지 급증했고, 뉴질랜드·호주·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은 앞다투어 김 씨를 초청해 장승 퍼포먼스를 하고 장승공원을 만들었다.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데 이보다 화끈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생일축배잔을 나눈 뒤 여왕에게 선물했던 '하회탈 얼굴을 한 장승 한 쌍'은 귀빈의 상징이 되었다. 아버지 부시(2005년) 아들 부시(2009년) 미국 대통령은 물론,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등 하회마을에 들른 국내외 국가원수급 귀빈들은 모두 선물받은 '하회탈 얼굴 장승 한 쌍'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만일 누군가 하회마을을 방문한 뒤 하회탈 얼굴 장승을 선물받지 못했다면 귀빈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제 생일은 4월 21일이 아니라 5월 2일(음력)입니다. 출생신고가 3년 늦어지면서 누구의 실수인지는 몰라도 생일까지 주민등록부에 잘못 기재된 것인데요. 이 실수가 제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생각해보면 기적이다. 출생신고를 정확하게 했다면, '미친 놈' 소리 들으면서 장승을 깎지 않았다면,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하회마을로 이사하지 않았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 회원이 아니었다면, 영국 여왕이 하회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이 한 가지라도 어긋났다면 오늘의 장승 명인 김종흥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전통, 대를 이어 지킨다

"그동안 제자가 10여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먹고살지 못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상한 풍조가 있는데요. 대중연예인들에게는 수백, 수천만원의 예산을 아낌없이 쓰면서 정작 예술가들은 홀대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무료로 퍼포먼스를 해줄 수 없느냐는 제안 아닌 요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김 씨에게 아들 주호(42·안동시 축제담당 팀장) 씨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이다. 주호 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자란 데다가, 장승문화에 대한 이론적 정립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바람을 돕기 위해 기꺼이 안동대 민속학과로 진학했다. 물론 아들의 이런 선택 배경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세계를 다니며 체험한 장승문화에 대한 국제적 인기가 있었다.

"엄청 부자인 캐나다 교포의 요청에 따라 아들과 함께 저택 정원에 장승공원을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요. 현지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지금은 입장료를 내는 유료공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아들은 2년간 캐나다 유학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우리의 것이야말로 진짜 세계적'이란 걸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바쁜 공직 생활 중에도 주말에는 탈춤 공연을 함께 하고, 틈틈이 장승도 깎고 있습니다."

김 씨는 "행위예술의 한 형태로서, 장승 만드는 과정을 춤·음악·조명 등을 이용해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승 퍼포먼스가 국내외에서 인기"라고 요즘 트렌드를 설명하면서 "10여 년 전부터 모아온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장승박물관을 지어 우리 문화를 계승·발전시킬 기반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과업"이라고 말했다.

<키워드> 장승과 솟대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나 길가 또는 절의 입구에 나무나 돌을 이용하여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말한다. 명칭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장생·장생표주·장생표·황장생이라 부른 기록이 있으며, 대체로 16세기 이후부터 장승으로 불렀다. 장승은 경계표나 이정표 구실과 함께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이며, 때로는 개인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 대상물이다. 전라도에서는 '소주' '소줏대', 함흥지방은 '솔대', 황해도ㆍ평안도는 '솟댁', 강원도는 '솔대' , 경상도 해안지방에서는 '별신대'로 부른다. 주로 한강 이남지역에 분포하며, 남부지방으로 내려올수록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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