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릉도의 삶과 문화-100년의 이야기①

'비워진 섬' 울릉도에 고종의 개척령이 내려진 지 136년이 지났다. 고종은 18년 뒤인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郡)으로 승격하고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했다. 울릉군은 이날을 '울릉군민의 날'로 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연다. 개척령 이후 섬으로 이주한 이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연에 순응하며 울릉도 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꿔왔다. 군민의 날을 즈음해, 과거와 오늘을 잇는 울릉도의 대표적인 삶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4차례로 나눠 싣는다.

<글 싣는 순서>

▶①오징어잡이
②강고배 제작
③음식문화
④종교와 삶

①오징어잡이

지난 3일 오후 6시10분쯤 김영철 영신호 선장이 저동항 동쪽 10㎞ 지점에 배를 세우고 조상기를 시험 가동하며 오징어잡이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멀리 보이는 섬이 울릉도다. 김도훈 기자
지난 3일 오후 6시10분쯤 김영철 영신호 선장이 저동항 동쪽 10㎞ 지점에 배를 세우고 조상기를 시험 가동하며 오징어잡이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멀리 보이는 섬이 울릉도다. 김도훈 기자

◆배에서 보낸 1박 2일

바다가 잔잔해 오랜만에 울릉도 선적 어선 100여 척이 조업에 나선 지난 3일. 오후 3시40분 울릉도 저동항을 출발한 오징어잡이배 영신호(9.77t)는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배가 저동항 동쪽 10㎞ 목표지점에 도착한 것은 4시20분쯤이었다. 인근에서 한 어선은 오징어 어군(魚群)을 찾지 못해 연신 바다를 헤맸다. 김영철(51) 선장은 엔진을 멈추고 같은 선단 어선과 무전 교신을 주고받았다. 어군탐지기를 통해 확인한 어군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김 선장은 마음을 정한 듯 뱃머리로 나와 물풍(조류를 따라 배가 이동하지 않도록 바닷속에 설치하는 장비)과 부표를 띄우며 말했다. "추석 전후가 성어기인데도 '이까'(오징어)가 없어요. 다들 어군이 보이질 않는다네요."

이날 오전 울릉도 현지 오징어 위판 가격은 20마리 1상자에 4만~5만원이었다. 활어로 횟집에 팔면 8만원 정도를 받는다. 김 선장은 전날 밤을 꼬박 새워 12상자를 잡았다. 근해 출어에 든 기름값 50만원을 겨우 건진 수준이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연료비 등 비용 부담이 커지는 만큼 어획량이 적을 경우엔 손해를 본다. 이날 김 선장이 먼 바다로 나가지 않은 이유다.

김 선장은 영신호의 유일한 선원이다. 함께 일을 하기로 한 인도네시아 선원의 일정에 문제가 생긴 탓이다.

4시 50분쯤 김 선장은 배 좌우에 설치된 조상기(오징어잡이용 자동 낚시 장비)를 폈다. 영신호엔 2대가 1조로 구성된 조상기 10조가 있다. 가동을 시작하자 조상기는 물레에 감긴 오징어잡이용 낚싯줄을 바닷속 120m 지점까지 풀었다가 다시 감아올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물레 하나에 감긴 낚싯줄엔 바늘이 32개씩 달려 있다고 김 선장은 말했다.

5시 2분 첫 오징어가 낚이자 김 선장의 입가에서 옅은 미소가 번졌다. 7시까지 2상자 정도가 올라오더니 조상기는 연방 빈 낚싯줄만 풀고 감았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기자를 향해 김 선장은 "(오후) 8시는 넘어야 올라 온다. 저녁이나 먹자"며 선실 쪽으로 안내했다. 김 선장은 선상에서 잡은 오징어 1마리를 손질했다. 저녁식사 메뉴는 가져온 김밥과 오징어를 넣은 라면이다. 평소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가끔씩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10시를 넘기자 어획량은 7상자까지 올라왔고, 자정이 되자 전날 어획고인 12상자를 넘어섰다. 선장의 손길도 바빠졌다. 김 선장은 활어로 팔 것을 제외한 오징어를 크기별로 나눠 20마리씩 용기에 담았다.

물풍을 거둬들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오전 4시 30분이었다. 김 선장은 "새벽에 조금 나아져서 30상자(600마리) 정도를 잡았다"고 했다.

4일 오전 5시 30분, 출항한 지 15시간 만에 저동항으로 돌아왔다. 김 선장을 마중 나온 그의 부인은 활어로 팔 오징어 10상자를 저동 활어회센터로 옮겼다. 김 선장은 나머지 20상자를 차에 실어 경매가 열리는 저동 어판장으로 향했다.

오전 6시 30분 열린 경매에서 김 선장이 잡은 오징어는 크기별로 상자당 4만9천700원, 3만5천원에 팔렸다. 기름값을 제외하면 대략 100여만원 정도를 번 셈이다. 김 선장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 주민과 100년 함께한 효자상품

울릉도 주변 바다에서 본격적으로 오징어잡이를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전 쯤이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1909년 8월 8일 자 '대한매일신보' 등을 근거로 "오징어 성어기가 되면 일본 어부 수백 명이 일시적으로 울릉도에 몰려들어 어족자원을 수탈했다. 한국인들은 배와 기술을 가진 일본 어부들에게 고용돼 일했다"고 말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앞마당엔 강에서 타는 작은 나룻배를 닮은 배 2척이 놓여 있다. 울릉도 사람들이 '강고배'라고 부르던 배다. 일본식 개량 목선으로 노와 돛을 이용해 움직이는 소형어선이다.

1960년대까지 어민들은 이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았다. 한 주민은 "조금만 나가도 오징어가 지천이라 큰 배를 끌고 먼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 시절 햇볕에 잘 말린 오징어는 울릉 주민들의 가장 큰 돈벌이 수단이자 효자상품이었다. 잘 잡히고 돈이 되자 자연스럽게 섬 어업의 90% 이상이 오징어로 집중됐다.

'호시절'은 1970,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울릉도 최대 어항인 저동항에선 "개도 천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시기 울릉도 인구는 지금의 3배인 3만명 수준이었고, 저동 버스정류장 앞 담뱃가게는 전국 담배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 위기에 처한 오징어 산업

현재 울릉도 오징어 산업은 위기에 처했다. 목선으로도 오징어를 풍족히 잡던 시절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됐다.

울릉군청과 울릉수협에 따르면 지난해 울릉도 어민들이 잡은 오징어는 총 930t. 어민들 입에선 "해방 이후 가장 적은 양"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역대 가장 많은 오징어가 잡혔던 해는 1993년으로, 그해에만 1만4천414t을 기록했다. 2005년까지도 연간 어획량은 8천~1만t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는 어획량 감소세가 고착화되는 모습이다. 2010년 2천897t으로 급격히 떨어진 이후 2014년 2천33t, 2015년에는 1천852t으로 곤두박질쳤고 최근 2년 간은 1천t에도 못 미치는 어획량을 보이고 있다.

동해 북한수역에서 입어료를 내고 조업하는 중국어선의 '싹쓸이 조업' 탓도 있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수온이 높아진 영향도 크다. 회유성 어종인 오징어는 제주도 주변 바다에서 태어나 울릉도 주변에서 성어기를 보낸 뒤 다시 태어난 곳으로 내려와 알을 낳는다. 하지만 온난화의 영향으로 오징어도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북상했다. 동해의 북한수역과 대화퇴 어장에 오징어가 풍부해진 배경이다.

과거 울릉도 어민들은 겨울에 오징어를 잡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5, 6월쯤 조업을 시작해 10월 말이면 그해 오징어 잡이를 마무리했다. 조업의 절정은 추석 무렵이었다. 하지만 요즘 조업 시기는 3개월 정도 뒤로 밀렸다. 11, 12월까지도 어민들은 바다로 나간다.

겨울철에 조업이 이뤄지면 조업일수가 뚝 떨어지는 게 문제다. 겨울철 동해는 거칠어 툭하면 풍랑특보가 발효된다. 어민들로선 말그대로 공치는 날만 늘어난 것이다.

올해 공식적인 오징어 위판은 지난 3일 처음 시작했을 정도로 늦어졌다. 다음날인 4일 오전 6시쯤 "오징어가 제법 잡혔다"는 소식에 저동 어판장을 찾은 장지영 울릉군 수산과장이 말했다. "겨우 이틀 제대로 조업했는데 또 며칠 공치게 생겼네요."

25호 태풍 콩레이가 서서히 한반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대다수 어선은 이날부터 8일 오전까지 조업에 나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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