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시간이 멈추는 듯하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난다. SP·LP판의 지직거리는 낡은 음색조차 낭만으로 바꾸어 버리는 그곳, 바로 1957년 문을 연 60년 전통의 고전음악감상실 '하이마트'(대구시 중구 동성로)다. 하이마트는 3대를 내려온 한 가족의 음악사랑이 녹아 있다. 아버지 뒤를 이어 딸이,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가 뒤를 잇고 있다.
◆클래식이 흐르는 오래된 공간
대구백화점에서 대구중앙도서관 방향으로 200m쯤 가다 왼쪽 건물 3층에 '하이마트'(heimat)가 있다. 하이마트는 독일어로 '고향'이라는 뜻으로 고향에 온 듯, 마음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다. 김순희(72) 대표는 "가끔 가전제품 판매점이 아니냐며 전화가 걸려온다"고 했다.
60석 좌석이 있는 감상실 안에는 2평 남짓한 전축실이 따로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 대표의 아버지 김수억(1969년 작고)과 어머니 초상화다. 김 대표는 "이곳에 들어오면 부모님을 생각할 수 있어 두고 있다"고 했다. 전축실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SP·LP판와 CD, 그리고 연주 실황을 담은 DVD·비디오테이프들로 가득하다. 찢어지고 누렇게 빛바랜 LP판은 지금은 구하기 힘든 음반들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라면서 "지금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음반"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가 음반 가운데 한장을 꺼내 들었다. 헨델 메시아 하이라이트 부문만 모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헨델 메시아를 유난히 좋아했다. 헨델 메시아 전곡이 실린 음반은 아버지 무덤에 넣어 주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없다"고 했다.
감상실에는 그랜드피아노 2대가 놓여 있다. 누구나 내키면 연주할 수 있다. 왼쪽 벽에는 수십년 된 칠판이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다. 칠판에는 손 글씨로 '모차르트의 오보에 협주곡 C 장조 K.314 '라고 씌여져 있다. 김 대표가 쓴 것이다.
◆ 아버지, 딸에 이어 아들 3대 이어져
하이마트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구 대구극장 맞은편 건물 2층이다. 서울에서 사업을 했던 김수억은 클래식 음반을 사 모으던 음악애호가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럭에 음반을 모조리 싣고 대구로 피란왔다. 전쟁이 끝난 뒤, 애써 모은 레코드판이 깨질까 봐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눌러앉아 1957년 음악감상실 문을 열었다.
하이마트는 개업 당시 '전후(戰後) 문화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루 평균 수백 명이 드나들었다.
1969년 김수억이 지병인 당뇨로 세상을 떠나자 외동딸 김 대표가 '바통터치'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영어교사를 꿈꾸고 있던 김 대표는 아버지의 '분신' 하이마트를 버릴 수 없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손님이 줄어들었다. 전축과 카세트테이프가 흔하게 보급되고 클래식보다 팝과 가요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1983년 새 상권이 조성된 현재 위치로 이사했지만 끊어진 발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이마트는 365일 문을 열었다. 김 대표는 "아직도 365일 문을 열고 있다"며 "지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수십 년간 인연을 계속 가져온 사람들이다. 명절 때 먼 곳에서 찾아오는데 혹시라도 헛걸음할까 싶어 쉴 수가 없다"고 했다.
3대인 박수원(47) 씨는 감상실에서 고전음악 선율을 자장가로 듣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박 씨는 중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반듯한 직장에 다니기를 바랐다. 결국 박 씨는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음대를 포기했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박씨는 음악에 대한 동경을 버릴 수 없어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2000년 프랑스 뤼옹국립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른한 살 늦깎이였지만, 지나간 세월을 보상 받으려는 듯 미친듯히 오르간을 두드렸다. 2006년 귀국해서는 자연스럽게 음악감상실을 이어받았다. 파이프 오르간과 작곡을 전공한 박 씨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대구가톨릭대, 성공회대 등에 출강하고 클래식 해설과 칼럼 등도 연재하는 등 음악 속에 파묻혀 지낸다.
하이마트의 가장 큰 자산은 오랜 세월 동고동락 해온 회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음악감상모임 '대구클래식아카데미'는 물론 30~60대 주부들이 주축을 이룬 '소향회'와 '비바체', 직장인들로 구성된 '뮤즈' 등이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박 씨의 부인 피아니스트 이경은(44) 씨는 ""요즘도 당시 추억을 못잊어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다"며 "과거나 지금이나 하이마트가 그런 나눔의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스) ◆ 4대까지?
박 씨는 감상실을 새롭게 바꿀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고전 음악 하면 '딱딱함'을 떠올리는 요즘 사람들에게 격식을 없애고 자유롭게 다가서고 싶어서다. 박씨는 매주 월요일 오전 클래식 입문 강좌를 열고 있다. "하이마트가 소수 마니아 중심으로만 운영되는 것은 원치 않다. 음악을 통해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요즘 하이마트에는 또 다른 단골이 생겼다. 감상실을 뛰노는 박 씨의 아들딸이 그 주인공이다. 이에 대해 박씨는 "아이가 하이마트를 꼭 맡고 싶어하면 당연히 시켜야죠. 단 저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건 반대"라면서 "아이가 원하는 쪽으로 가야 일이 즐겁고 하이마트도 발전이 있지 않을까요. 아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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