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가 있는 소수서원을 마음 놓고 걸었다.
겨울나무들은 꽃 시간과 풍경을 만들고 늙은 당간지주는 바람소리를 지키며 의연하게 서 있었다.
물이 자고 간다는 숙수사 절터 하늘은 회색구름이 광채를 띠고 물오리들은 떼 지어 허공을 갈랐다. 새들은 날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한다. 버릴 것을 버릴 수 있다면 저 구름처럼 자유롭고 새처럼 활발한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질 때 그 곳에는 어디에서나 빈 의자의 적막을 느낄 수 있다. 선비촌의 책 읽는 소리도 어린이 놀이터의 깃발도 야구장의 환호성도 버스터미널의 시간표도 그 자리에 종말과 시작의 빈터가 남는다. 시간과 시간이 하루와 이틀이 한 달과 한 달이 한 해의 끝에서 쌓이고 흩어지는 윤회의 작은 수레가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의 마지막에 이르면 바다가 있는 것처럼 시간의 끝에는 죽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결과로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톱니처럼 맞물려 있어서 동시적으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도 생의 끝에 있지 않고 언제나 생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다고 말한다. 새삼스럽게 선물 같은 한 해가 간다. 동지부터는 새해가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절박하지만 소중하고 행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나에게 빛이 되어준 스승들, 그림자가 된 시주의 은혜,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의 힘, 건강을 지켜주는 공기와 물, 가장 사랑하는 책과 찻잔들….
사람은 혼자서 살아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린학생들에게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읽으라고 선물했다. 뜨거웠던 여름에는 무성한 서어나무의 그늘과 맑은 바람을 그리워한다. 서어나무로 가는 숲길은 옛 친구처럼 언제나 설레는 만남이다. 그 신비와 전설들도 지금은 겨울안거에 꿋꿋하게 침묵으로 바라본다. 세월의 긴 풍상을 견뎌내며 오랜 기다림의 벗은 몸으로 겨울정원의 총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에 흔적을 남긴다. 나무를 자르면 시간이 감고 간 연륜을 볼 수 있다. 노인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처럼 시간 속에서 살고, 시간 속에서 존재 할 수 있기에 인간의 삶이 결정되어진다.
고흐의 그림 '구두'는 하이데거로 하여 철학적 사색을 하게 했다. 발자국은 사라지지만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 일 것이다.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직면하고 또 이기적 일 수 있다. 작은 선물이라고 주고 받을 때, 각박하고 냉혹한 인정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스님의 말씀처럼"년년이이하여 잠도사문(年年移移 暫到死門)이니라"
한해 두해가 지나고 지나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에 도달하니 급하고 급하지 아니한가.
찬바람 속에서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은 나와 연관되어있다. 사랑, 행복, 가족, 돈, 희망, 화해, 용서 이런 낱말들은 오직 한 평생을 두고 같이 하는 숨이 벅찬 욕망들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12월은 버리는 달이다. 그래서 버릴 것만 남는 달이다.
눈을 들어 밖을 바라본다. 새해가 오고 있었다. 묵은 의자를 비우고 새 의자를 준비 할 때이다. 거기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 마음자리 함께 하니 모두 행복하기를!
청련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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