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철조망 밖은 유신(維新)으로 죽네 사네하며 한참 떠들썩했지만, 민통선 북쪽 임진강의 겨울 병영생활은 한가롭기만 했다. 물론 얼마 뒤 동계 훈련이라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 다가 올 때까지만 그랬다는 이야기다.
한 병사가 막사에 기대 앉아 하루 종일 나팔 부는 연습을 한다. 말이 연습이지 피스톤 없는 군용나팔은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청송 산골짜기에서 약초 캐다 입영한 농투성이 병사는 악기라고는 버들피리 밖에 불지 못한다. 어느 날 중대장이 나팔하나를 던져주며 기상나팔과 취침나팔을 불라고 명령을 했다. 이 병사는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혼자 아무리 불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 군용악기와 며칠을 씨름하다 결국은 포기하고 악기를 반납하고 만다. "까라면 까야지" 명령 불복종한다며 중대장한테 흠씬 얻어맞았다.
1968년 한국 공군조종사 16명이 미국으로 건너가 혹독한 훈련을 받고 1969년 8월 29일 오후 3시 대구 비행장으로 팬텀기를 몰고 왔다. 8대의 팬텀기는 3번의 공중급유를 받으며 태평양을 건너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 착륙한다. 그 곳에서 성조기를 지우고 동체에 태극 휘장을 새긴 뒤 다시 이륙해 제주도 상공에서 마중 나온 우리 공군 전투기들과 합류하여 대구로 오게 된 것이다. 1969년 9월 23일 한국 최초의 팬텀기 비행부대가 '제151 전투비행대대'라는 이름으로 대구 공군비행장에서 창설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팬텀기를 조종해 태평양을 건너 온 위대한 보라매들을 표창한다. 대령 전치범(공사2기), 중령 김인기(공사3기), 중령 강신구(34회-조간6기,), 중령 김재수(공사5기), 중령 이재우(공사5기), 중령 이원순(공사 5기), 중령 한증근(공사5기), 소령 박근태(공사6기)에게 공로표창장을 수여한다.
이 행사에 참여한 강신구 중령은 배우 강신영(신성일)의 형으로 나중에 소장까지 승진하였다. 팬텀기 인수 계획에 참여했던 대구 출신 조근해, 이광학 소령 등은 나중에 공군참모총장과 공군사관학교 교장까지 진급을 하고 전역한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구 공군비행장이 가장 컸다. 금상첨화 격으로 그 비행장에 세계적인 최신예 팬텀 전폭기가 주둔하게 되자 대구 시민들의 공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빨간 마후라 들보다 더 깊고 컸다.
당시 불로동은 뒤는 고분군이요 앞으로는 불로천이 흐르고 그 주변은 능금나무로 뒤 덥힌 동화 같은 마을이었다. 요즘도 그 길은 남아 있는데 불로동 재래시장을 통과해서 동화사 가는 버스가 다녔다. 이 꿈같은 마을이 전투기들 때문에 시끄러웠다. 소음은 밤이면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공군들이 비행기 엔진을 정비하느라 굉음(轟音)을 내다 말다하는 바람에 불로동의 밤은 괴로웠다. 낮의 소음은 비행기가 검단동 쪽으로 이륙하면 이내 조용해진다. 잠깐만 참으면 된다. 하지만 야간 엔진 테스트는 지상에서 기약 없이 악을 쓰니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밤 10시가 되면 별빛 교교한 동촌의 밤. 공군 비행장에서 취침 나팔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위(四圍)는 적막강산, 새벽 예불의 목탁 소리 같은 한 밤의 트럼펫소리에 비행장 공군 장병들의 가슴은 축축해지고 눈꺼풀은 무거워진다. 종일토록 전투기 조종연습 했던 빨간 마후라들, 이를 통제하던 관제사, 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던 병사, 보급품을 나르던 병사, 비행장을 경계하는 육군병사들, 주민들 고달팠던 하루를 마감한다. 임진강변 GOP부대 병사들은 듣지 못하는 취침 나팔소리를 대구 11전투 비행단 병사들은 꿈속의 자장가 삼아 단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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