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한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가족관계는 물론 친인척도 아닌 연세 지긋한 어른과 하루 나들이를 간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닐 터이다. 89세의 노교수와 60대 중반인 제가 이렇게 나서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겨울 J회장님과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향우회에서 만나 교분을 나눈 지도 이십 여 년에 가까워 온다. 대화가 한 창 무르익어 갈 무렵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에 다녀온 안동 지역이 화제에 올랐다. 안동댐과 월영교, 봉정사, 그리고 근래 들어 관광객이 몰리고 있는 경북도 청사 등을 거론하였다.
"회장님, 이 세 곳에 여태 가보지 않았습니까?"
그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긴 세월동안 어느 한 곳에도 가보지 않았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K의대 학장을 지냈고, 아들은 대학병원장, 딸은 유명 국립대학의 이름난 교수여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와 버렸다.
"회장님, 겨울지나 날씨가 풀리면 제가 안내할 테니 안동 근교로 여행 한번 떠나시지요?"
대단히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추위가 가고 따뜻한 봄볕이 내리 쬐이는 날 나는 그날의 약속을 기억해 내었다.
생각날 때, 그리고 여건이 허락할 때 실천에 옮겨야 한다. 누구와 맺은 약속인데 이를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이날이 낀 연휴 3일을 틈타 마지막 날이 어떤지 여쭈어 보았다. 일언지하에 예스다. 가정의 달인 5월에 가지는 삭막한 두 남자의 여행 그림을 머리에 떠올려 본다.
약속한 날,시간에 맞춰 아파트 앞으로 갔더니 환한 표정으로 반긴다. 야외로 놀러 가는데 넥타이도 매고 평소 쓰지 않던 중절모까지 착용하여 잔뜩 폼을 잡았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대화가 마구 쏟아진다. 장군 멍군 호흡이 척척 맞는다.
제일 먼저 들린 안동댐 아래 월영교와 수변 경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태 안동댐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가는 곳, 보는 것마다 감탄 연속이다. 여행을 얼마나 갈망했으면 이런 반응까지 보일까.
점심 식사를 위해 인근 식당에 들렀다. 안동의 명물인 헛제사 밥을 시키자 그는 반주를 청한다. 막걸리 소량을 시켰더니 한 단지를 올린다. 이걸 어떻게 다 마신담? 나는 술을 못 마시는 데다 운전까지 해야 하니 권할 리 없다. 적당히 마시고 남겨둬도 좋을 텐데 회장님은 아깝다며 무리를 하신다. 모처럼 가지는 즐거운 여행길인데 만류할 입장도 못된다.
최고의 지성에 최고의 가이드가 붙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지당한 말이라며 크게 웃는다. 이토록 잘 맞는 찰떡궁합이 어디 있을까. 이 틈을 타 내가 깜짝 제안을 하였다.
"회장님, 이 참에 저에게 고품질 가이드 인증서 하나 만들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대구의 최고 명문 대학 의대학장이 가이드에게 주는 품질 인증서라면 어디 가나 먹혀들 게 아닌가. 농담조로 끄집어낸 제안인데 절묘하다며 박장대소한다.
봉정사를 거쳐 경상북도 신청사를 돌아본 후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오늘의 나들이를 정리한다.
자칫하면 수포로 돌아갔을 법한 우리들의 약속을 지킨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회장님은 벌써부터 다음 나들이에 대한 기대감을 표한다. 가능하면 자주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무더운 여름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시 여행하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아쉬움 속에 헤어졌다. (2018. 5. 8)
* 가을이 되면 다시 여행 떠나기로 약속한 우리들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회장님은 2018. 8. 29일 갑자기 별세하셨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다. 조준승 박사님,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빕니다.성병조(대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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