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침묵의 교구를 향한 기도

이미애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

정적이 감도는 본당에 나란히 배치된 250석 규모의 기구대가 썰렁하게 보였다. 하지만 우뚝 선 제단 중앙에 커다란 켈트형 십자고상이 걸려 있고 스테인드글라스(창문) 틈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부서지며 양쪽 벽면에 걸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신(聖神) 초상화를 훤하게 비출 때 한결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직후 방북단이 돌아본 평양 장충성당의 내부 모습이었다.

켈트형 십자고상과 성신 초상화는 만수대창작사가 조각하고 그린 것이라고 했다. 만수대창작사는 '김씨 왕조'를 우상화하기 위해 그림과 기념물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십자고상과 성신 초상화까지 제작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의 유일한 장충성당은 종교의 자유를 가장한 가짜 관제성당에 불과할 뿐이었다. 붉은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으면 목숨을 잃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천주교 평양교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가 교구를 설정한 1927년. 올해로 92주년을 맞았지만 지금은 유서깊은 평양교구가 모두 사라지고 수난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적국 출신인 메리놀외방선교회부터 추방했다. 그 당시 평양교구는 성당 19곳, 공소 106곳에 신자가 2만8천4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교세는 꾸준히 신장해 1945년 8·15 광복을 맞았을 때 성당은 57곳, 신자수는 5만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48년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평양교구를 이끌어왔던 홍용호 주교는 납치, 실종돼 생사를 알 수 없었다. 6·25전쟁 땐 모든 사제와 수도자들이 납치 또는 순교했거나 월남했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무렵 평양교구는 사제도, 수도자도, 신자도 없는 '침묵의 교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는 북한 신자들을 잊지 않고 있다. 평양에서 태어나 사제가 된 황인국 몬시뇰은 북한엔 아직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동포들이 많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2015년부터 평양교구 말살 당시의 성당 57곳 중 한 곳씩 정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직 간절한 기도만이 자유와 평화를 싹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여! 여기 침묵의 교구에 다윗의 힘이 솟게 하여 주시고 등불을 켜 주시옵소서."

이미애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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