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③열망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똑같은 연세에 성자아버지는 우리아버지와 달리 면사무소에 다니며 펜을 굴리고 있다. 그것하나만 보더라도 배움의 차이는 참으로 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성자아버지는 배움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반면에 우리아버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핀잔만 늘어놓는다. 어머니도 똑같다. 하긴 그 아버지와 함께 사는 부부니 같을 수밖에. 사람은 끼리끼리 사는 법이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진정 내 판단으로는 성자아버지의 생각과 말이 백번 옳다고 여겨졌다. 나는 머리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으므로.

"숙자야, 공부 열심히 해."

어느 날, 당숙모의 딸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온 다음 느닷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당숙모의 딸을 바라봤다. 뜻밖이었다. 아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당숙모의 딸로부터 듣고 보니 나는 어안이 벙벙해 두렵기까지 했다. 농담이려니 여기며 숨을 거푸 몰아 내쉬는데 당숙모의 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너 곧 다른 곳으로 가거든. 그래서 내가 선심 쓰는 거야."당숙모의 딸이 웃음을 멈추지 않고 또 말을 뱉는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때야 입을 열고 물었다."무슨 소리야? 내가 가긴 어디로 가?"

"그런 거 있어. 비밀."당숙모의 딸이 또다시 헤헤거린다."말해봐, 궁금하잖아. 농담이지?" 내가 눈망울을 굴렸다."아냐. 진짜야."도무지 알 수 없는 당숙모 딸의 말, 나는 머리끝이 쭈뼛 가슴속이 떨려왔다. 하지만 당숙모의 딸을 믿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입술을 삐죽한 다음 곧바로 내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어설픈 밤이었다.

당숙모 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내내 마음에 걸리고 찝찔한 기분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싱숭생숭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보니 자주 소변이 마렵다. 뒷간을 들락거렸다. 미적지근한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다. 소변을 몇 번이고 확 쏟아냈지만 꺼림칙한 기분이다. 나는 뒷간에서 나온 뒤 마당가를 서성거렸다. 밤하늘의 별빛이 유독 애처롭게 느껴졌다 유별스럽게 밝은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져간다. 나는 숨을 거푸 내쉬고 다시 내 방으로 가기위해 발길을 옮겼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가까이 다가가 봤다. 다름 아닌 당숙모의 방이었다. 숨을 죽였다. 당숙모의 목소리와 섞여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는 당숙모의 딸이 분명했다. 나는 더욱 발자국을 죽이고 마루 끝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헌데 좀 더 정확하게 들려오는 당숙모와 딸의 목소리가 나를 일순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지를 벌벌 떨며 몸을 바짝 움츠렸다.

"어머니, 그게 정말이야? 숙자를 그 병신한테 시집보낸 다는 게?"

"그렇다니까. 내가 숙자를 데려올 때 쌀 두가마를 줬잖아. 그러니 본전은 뽑아야 되지 않겠니. 곱에다 더 보태 다섯 가마를 준다는데 그런 횡재가 어디 있겠니. 빨리 서둘러 보내야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발을 떼 옮기려 해도 도무지 움직여주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본전생각에 이중으로 나를 팔아넘기려는 당숙모의 속심, 나는 더 이상 들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뒤돌아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내 머릿속은 그 순간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당장 갈 곳도 없는데 어디로 갈까. 오만가지 근심걱정이 한데 어우러져 나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다. 머뭇거렸단 내 신세가 어찌될지 모르는 판국에 뭘 망설이고 뒷일을 염려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그리고 부리나케 뒷길을 향해 내달렸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사방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들짐승도 귀신도 멀리서 짖어대는 사나운 개의 소리도 전혀 무섭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사람을 만날까 그것이 겁나고 조바심쳐질 따름이었다.

얼마나 달리고 거듭되는 발걸음을 뗐을까. 저 멀리 희미한 가운데 시내가 보인다. 드디어 목포역에 도착했다. 나는 거침없이 역 안으로 달려 들어가 마침 움직이는 기차를 탔다. 잠시 후, 기차는 머리 부분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우렁찬 기적소리와 함께 어딘가를 향해 마구 달려 나갔다. 아직도 가슴속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당숙모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난다. 표독스런 모습이다. 이내 매를 든다. 그리고 사정없이 내 몸을 내리친다. 나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고통을 안으로 삭이며 감내해야만 했다. 마음속으로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를 외우며.

3. 세상의 벽

눈을 떴다. 들녘의 푸른색깔이 차창 밖으로 쉴 새 없이 스쳐간다. 얼마나 오랜만에 가슴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경관인가. 저 멀리 하늘엔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숨을 훅 뿜었다. 내부에 쌓여있던 고통의 시간들을 전부 내뱉어버리고 싶었다. 당숙모의 집에서 2년을 살았으니 이제 내 나이 16살이다. 세상에 눈뜨기엔 아직 어린나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보다 강하게 맞서고 싶다. 짧은 삶에서 느꼈던 숱한 사연을 거울삼아 나는 반드시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련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굳은 의지를 마음에 다졌다. 차창 밖 하늘은 마치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한껏 청아하고 맑아보였다.

무임승차를 한 탓에 나는 승무원에게 끌려 서울역에서 내리자마자 역무실로 직행했다. "너, 가출했지?"

대뜸 나를 향해 내뱉는 역무실 직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바짝 수그렸다.

"집이 어디야? 되돌려 보내줄 테니 말해봐.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무작정 상경을 해. 눈뜨고 코 베어간다는 말 못 들어봤어? 부모님은 또 얼마나 속을 썩을 것이며. 휴!...... 너희 같은 애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 제발 주는 밥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될 걸, 왜 가출은 하는지 모르겠구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뛰어들면 누가 밥 주고 재워준대? 하긴 착각은 자유지만. 집 생각, 부모생각 간절하게 될 건데 뭣 땜에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너무 호강스러워 탈 난 거 아냐? 집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쯧쯧."

(2월12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인 '열망' 4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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