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는 16세기 황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에겐 없어선 안 될 향신료였기 때문이다.
거래가 제일 많이 일어난 곳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교역으로 떼돈을 번 졸부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방법이란 게, 파티를 열어 '금쪽같은' 후추를 음식에 잔뜩 뿌리는 것이었다. 너무 과한 후추 때문에 오히려 고기를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베니스의 상인'의 일부다.
사람들은 과시욕에 빠져들기 십상이지만 이것에 치중하다 보면 '고기를 못 먹을 정도로 뿌려진 후추'처럼 본질을 훼손한다.
정치권에서도 과시는 '교만'으로 이어져 지탄의 대상으로 쉽게 변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0년 집권' 발언은 그 의도와 다르게 진보층의 지지보다는 오히려 보수 결집을 불러왔다.
한 야당 의원은 "당시 발언에선 민주당의 수많은 대선 패배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같은 절박함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며 "그저 '최순실 사태'로 쉽게 얻은 정권이 천년만년 자신의 손아귀에 머물 것 같아 보이는 교만으로 비쳤다"고 지적했다. 발언이 있은 후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 선거판이 대선 주자급으로 격상했고, 전국에 산재한 태극기 부대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한국당에서 나온 '5·18 망언 논란'도 과시에서 나온 교만의 결과로 보인다. 논란 당시 한국당 지지율은 꾸준히 상승했고, 30% 재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탄핵 이후 한자릿수 지지율이 상승가도를 달리자 일부 의원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소재까지 건드린 것이다. 지지율 상승이 불러온 교만을 '광주'에까지 과시하려 했던 일부의 오판은 여론의 호된 질책만 불러왔다.
야당은 여당과 상황이 판이하다. 여당은 정책을 책임지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당한 홍보와 과시하기 위한 포장술이 불가피하다.
반대로 정책적 성과물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야당으로선 국민적 지지만이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게 한다. 정부 견제 활동이 힘을 얻고 정권 탈환의 동력을 키울 수 있는 부분도 전부 민초에 의지해야 한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겸손 만한 무기가 없다. 정부·여당 견제 목적이 결국 국민을 위한 것이란 등식이 성립될 때만 대중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최근 정치적 교만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여당에서 먼저 나왔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지방선거 대승 이후 여당이 조금 교만해 진 게 아니냐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3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호소 짙은 목소리도 '히트'를 쳤다. "귀를 닫고 눈을 뜨지 않는 정치인들 때문에 국회가 오만과 독선에 빠진다"고 목소리를 높인 대목에선 공감을 얻을 만했다. 다만 한국당의 한 의원은 그의 연설을 90점짜리로 평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발언을 방해할 때 미소 짓거나, 회의장을 나서면서 '화이팅'하는 제스쳐만 없었다면 100점을 줬을 것"이라는게 이유다. 겸손은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절박함에서 나온다는 지적이었다.
겸손이 지나치면 아첨에 가깝다지만 정치권은 그래도 겸손해야 한다. '갑' 위치에 있던 위정자들이 국민을 '갑'으로 모시고, 스스로 '을'의 자리를 찾아서 하는 '아첨'이라면 대중은 결코 싫어할 리 없다.
박상전 서울정경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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