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대구언론계의 불행한 일

'대구언론계 창시 이래의 불행사에 관하여 부녀일보 편집국장 최석채 씨는 공적입장으로 11개 조건에 관한 광범한 반박질문서를 아데어 대좌에게 제출하고 민성일보 편집국장 민영근 씨도 구두로 반박의견을 제시한 바 있어 금후의 기대가 적지 않다'(부녀일보 1947년 5월 7일)

부녀일보와 민성일보의 편집국장이 미군정에 항변한 대구언론계의 불행한 일이란 뭘까. 1945년 해방이 되자 대구에서는 9월부터 민성일보를 시작으로 신문창간이 잇따랐다. 일제에 억눌렸던 말할 자유의 간절함이 신문창간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내세우던 언론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남북과 좌우로 갈라진 이념갈등에다 미군정에 기댄 친일세력이 부활해 도돌이표 목소리를 낸 까닭이 컸다.

권력을 등에 업은 이들 세력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폭력적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구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녀일보 편집국장인 최석채의 구속은 언론 길들이기의 한 사례였다. 시내 만경관 앞에서 경찰이 취재기자를 검문하다 구타‧구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방기자 구타사건'이었다. 최석채는 이를 비판하다 구속됐다. 또 민성일보는 수시로 테러와 출입금지를 당했다. 이 같은 언론핍박은 대구언론계의 불행한 일로 여겨졌다. 두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미군정을 향해 공개적으로 반박한 이유였다.

최석채의 구속은 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는 경찰의 기자폭행을 이틀에 걸쳐 연거푸 지면에 실었다. 그러자 경찰은 구속으로 대응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기자가 아닌데도 분노한 것은 조선인을 못살게 굴던 일제순사의 악습을 다시 봤기 때문이다. 구타당한 기자는 영남일보였다. 그의 반골DNA는 한참 뒤인 1955년 9월에도 되살아났다. 매일신문 주필 때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권력의 횡포를 비판하다 구속되었다.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테러는 해방공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민성일보의 경우 수시로 공무국이 피습 당했다. 폭탄 테러로 신문 발행을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민성일보는 미군정과 한민당 등에 매우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다. 이는 신문사가 잦은 테러를 당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언론테러와 탄압이 계속되자 출입기자단은 제5관구경찰청(경북경찰청)장에게 통고문을 보내고 경찰청의 출입을 중지할 정도였다.

당시 경찰은 권력의 입맛에 맞춰 언론자유를 통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자를 폭행하고 이를 비판한 편집국장을 구속했다. 신문사를 습격하고 활자 케이스마저 부수는 등의 막무가내 테러에도 뒷짐을 졌다. 이런 언론탄압에 기자들은 때때로 검찰·경찰과 대립하면서 해당기관 출입을 중지하기도 했다. 또 미군정을 향해 테러박멸을 요구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이제는 그 때와 꼭 같은 대구언론계의 불행한 일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의 깊은 시름이 봄눈 녹듯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닷새 뒤 맞는 올해 신문의 날 표어는 '신문 보며 배우네 나무도 숲도 읽어 내는 안목'이다. 어찌 나무와 숲을 읽어내는 안목이 독자에게만 필요할까.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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