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 자기낙태죄와 제270조 제1항 동의낙태죄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을 '헌법불합치'로 결정했다. 이로써 낙태 합법화의 문이 열렸고, 내년 12월 31일까지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낙태죄 조항은 그다음 날부터 효력을 잃게 되었다.
사실 낙태죄가 있건 없건 간에, 한국은 그동안 낙태에 있어서 어지간한 국가의 통계를 멀찍이 따돌리는 수치를 보여 왔다.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실태조사를 보면 가임기의 조사대상 1만 명 중 임신경험 여성의 약 20%가 인공임신중절을 경험할 만큼 낙태가 많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보건복지부 연구에서 추정한 29.8%에 비해서는 대폭 줄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임신부 다섯 명 중 한 명이 인공임신중절을 택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대단히 드물거나 미약해서, 2005년의 통계에 따르면 연간 추정낙태 시술건수에 대한 기소율은 약 7만 분의 1에 불과하며, 기소된 이들 모두 벌금만 부과되는 약식기소로 가볍게 처리되었을 뿐이다.(임웅, '낙태죄의 비범죄화에 관한 연구')
결국 국가권력을 포함한 다수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을 무시하면서 사문화시켜 왔고,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방벽마저 허물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 안에서 건전하고 생산적인 정책 토론과 합의를 가로막는 선전선동이 난무했다는 사실은 지금이라도 짚고 가야할 것이다.
우선 낙태죄에 관한 여론을 호도하는데 한몫 했던 언론들의 행태를 보자. 예컨대 2018년 5월의 언론기사들은 학계에서 존경받는 한 윤리학자의 인터뷰 기사를 쏟아내면서 "강간당해 임신해도 아이는 낳아야"는 식의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다. 지금도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는 모자보건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수 있으므로 형법상의 낙태죄 존폐 여부와는 무관하다 하겠으나, 많은 언론과 단체들은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윤리학자가 주장한 본질과는 별 상관없는 문구를 부각시킴으로써 논점을 흐렸다.
언론과 낙태합법화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들이 침묵하거나 감추다시피 한 사실은 그 외에도 여럿이다. 불법 낙태로 인해서 여성들의 건강권이 훼손된다든가, 계급적 차별이 심화된다는 주장 또한 거의 모든 인공임신중절 수술이 병원에서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비용 부담 또한 상당히 낮은 한국의 실태에 비추어 본다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왜 언급하지 않았는가. 인공임신중절을 경험한 사례들의 절대 다수가 피임을 하지 않았거나 불완전한 피임법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오늘날 고학력 여성들이 대폭 늘어난 현실, 그리고 인공임신중절의 평균연령이 28.4세에 이르는 현실과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번 헌재의 결정은 낙태죄 논의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일 뿐이다. 내년 말의 대체 입법 시한까지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토론에 참가하는 이들이 주어진 현실과 연구 자료를 왜곡하거나 선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다루는 태도일 것이다. 생명 존중과 약자 보호라는 대의마저 희화화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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