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기불황시대를 사는 2030 리포트] <2>취직 대신 '취가'로 눈돌리는 남성…계층이동 사다리 끊어지며 결혼이 자산확보 기회로

최근 동창회 모임에 참석했다 한동안 잊고지냈던 한 친구의 소식을 들은 A(32) 씨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5년째 취업준비생 신분이었던 친구가 7살 연상의 의사와 결혼해 이제는 개인 사업체를 가진 사장님이 됐다는 것이다. A씨는 "그 친구는 요즘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하더라. 동창회 나온 친구들 모두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A씨는 또 "부잣집에 시집 잘 가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지내는 건 여성들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남성들이 돈 많은 처가 보고 결혼했다거나, 능력있는 연상녀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며 "이번 동창회에서도 미혼인 친구들은 차라리 힘든 취업 준비를 할 게 아니라 살림을 배워 '백마 탄 여왕님'을 찾는 게 빠르겠다는 얘기가 화제가 됐다"고 했다.

◆돈 많고 여유 있는 여자 찾아요, '취가'가 대세

최근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취가'(취직 대신 장가간다)라는 단어가 부쩍 많이 쓰이고 있다. 예전 여성들이 힘든 취업 대신 시집가기를 택하는 것을 지칭한 '취집'을 남성의 사례에 빗댄 신조어다.

경산의 한 대학을 다니는 B(25) 씨는 나이가 좀 많아도 의사나 사업하는 여성을 만나 '취가'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는 "여자들도 취집이란 말을 쓰지 않느냐. 돈 많은 여성 만나 집에서 살림하면서 사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C(29) 씨는 "요즘 친구들끼리 '취가하고 싶다', '전문직 아내 만나 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바늘구멍인 취업문 때문에 힘든 구직 생활을 그만 청산하고 싶거나, 봉급은 쥐꼬리인데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남녀 간의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지면서 2030 젊은 세대들의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돈은 남성이 벌어와야 한다는 관념이 희박해지면서 젊은 남성들이 능력있는 반려자를 만나고 싶다는 '취가'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늘었다. 가진 배경과 돈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사회가 되다 보니 힘겹게 노력해 성공하기보다는 여성의 재력을 빌려서라도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는 것.

2018년 대구시 결혼·이혼통계에 따르면 초혼 부부 중 여성이 6~9세 많은 부부가 2017년 56건에 비해 지난해 16.1% 늘어난 65건, 여성이 10세 이상 많은 부부도 같은 기간 15건에서 13.3% 증가한 17건으로 집계됐다.

◆장기불황 20년 '샷다맨'의 귀환

사실 '취가'라는 신조어가 생소하긴 하지만 개념 자체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과거 역사에도 '데릴사위'가 존재했고, 외환위기(IMF) 이후 한동안은 '샷다맨'(셔터맨·직업 없이 아내가 하는 가게 문 열고 닫아주는 남자로 산다는 뜻)이 남성들의 로망이었던 때도 있었다. 이 역시 여성의 재력에 기댄 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취가'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샷다맨'이 일견 부러움의 대상이면서도 내심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면 요즘은 "살림하는 남자가 뭐 어때서?"라고 당당해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점이 차이다.

'여자가 능력 있다면 남자가 살림해도 괜찮다'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요리학원에 다니는 남성들도 급증했다. 중구의 한 요리전문학원 관계자는 "최근에는 아예 미래의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우는 남성들이 크게 늘었다"며 "직장인 취미반 등 쿠킹클래스에는 5~6명의 남성들이 참여하고 있고 문의도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끊어진 계층 이동, 재력가 배우자 통해 '자산' 확보

이처럼 젊은이들이 '재력 있는 배우자'를 찾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흔히 '개천에서 용 났다'는 계층 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계층 이동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결혼'을 기회 삼아 재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한 가닥 희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연말 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20대 청년 10명 중 6명(61.6%)은 '일생 노력해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4년 전 같은 질문에 46.8%가 답한 것에 비하면 1.3배 급증한 수치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과거 기성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상황이 더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었지면, 현재 2030 청년들은 일자리 부족, 갈수록 나빠지는 경기 등 불확실한 미래 속에 살다 보니 배우자의 자산을 통해서라도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며 "결국 임금을 높이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등 젊은층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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