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전쟁이 뭐꼬... 호국보훈의 고장 칠곡에서 되짚는 전쟁의 기억

호국평화기념관, 다부동 전적기념관... 호국정신 지역정체성 삼은 칠곡
왜관철교, 호국의 다리에서 만난 칠곡가시나들의 詩... 전쟁의 참상
팔공산 종주 시작점인 가산산성은 백병전의 기록... 지금은 전원마을로
별미의 시간, 캠프 캐럴 후문 경양식 식당... 콜라가 맛있어지는 마법

호국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관람객을 맞는 철모와 55발의 총탄. 55일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이곳의 역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호국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관람객을 맞는 철모와 55발의 총탄. 55일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이곳의 역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왜관역'이 호명되면 대구에 다 왔다는 신호였다. 무궁화와 비둘기에 몸을 싣던 시절이다. 대구가 코앞이다. 20km다. 대구로 기어이 들어오려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을 기필코 막으려 했던 이들이 있었다. 1950년 8월이다.

군가 '최후의 5분'을 기억하는가. 왜관을 중심으로 한 칠곡군은 지금 대한민국의 버팀목이 된 곳이다. '우리가 밀려나면 모두가 쓰러져, 최후의 5분에 승리는 달렸다'는 가사처럼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선두에 있던 왜관에서 우리는 55일을 버텼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이후 69번째 6월 25일을 앞두고 찾은 칠곡이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유학산. 자전거 라이딩의 성지가 된 유학산에선 아직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유학산. 자전거 라이딩의 성지가 된 유학산에선 아직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다부동 전적기념관

관람객을 맞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강렬하다. 오래된 기억 속 공간이다. 1981년 준공된 다부동 전적기념관이다. 40년 가까이 외형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탱크 모양을 형상화한 그곳이니 틀림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로가 확장되고 교통이 편해지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줄었다. 관리를 맡은 한국자유총연맹 측도 변하는 세태를 인정한다. 방문객이 연인원 50만명 수준이라고 했다. 주변에 함께 둘러볼 곳도 마땅찮다. 일부러 이곳만 보러 와야 하는 곳이 됐다.

유학산에 오르려는 이들이 산행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기념관에서 유학산이 바로 보인다. 중앙고속도로 다부터널을 지나면 위압적인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그 산이다. 해발고도 839m 정도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홀로 돋보인다. 매년 힐 클라이밍 대회가 열리는 자전거 마니아들의 성지다. 한 번 라이딩하고 나면 허벅지 두께가 2cm씩 늘어난다는 유학산에선 매년 한국전쟁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유학산. 자전거 라이딩의 성지가 된 유학산에선 아직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유학산. 자전거 라이딩의 성지가 된 유학산에선 아직 한국전쟁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다부동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유학산은 살아 내려가기 힘든 곳이었다. 높은 산이었고 깊은 골이었다. 조지훈 시인의 '다부원에서'처럼 '彼我(피아) 공방의 화포가 한 달을 내리 부르짖던 곳'이었다.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을 만큼.

팔공산 종주의 시작점으로 사랑받는 가산산성은 한국전쟁 당시 백병전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사진은 가산산성 진남문.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팔공산 종주의 시작점으로 사랑받는 가산산성은 한국전쟁 당시 백병전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사진은 가산산성 진남문.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가산산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을 만큼 오래된 요새다. 지금은 등산로로 고마운 가산산성이다. 팔공산 종주의 시작지로 선택되기도 하는 이곳은 한국전쟁에서 백병전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1950년 8월 18 ~ 27일까지 전투가 있었다.

백병전은 육박전이라고도 부른다. 총알로 싸우는 전투가 아니다. 코앞에서 목을 조르고 급소를 찌른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이다. 살려달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측은지심에 경중이 있으랴만 '살려주시라요'와 '살리주이소'에는 차이가 생긴다.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서글픈 이야기가 있다. 가산산성에 있던 북한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의용군에게만 가산산성 사수를 명령하고 도주했다고 한다. 국군이 "대구 출신은 손뼉을 치고 나오라"고 외치자 사방에서 38명의 의용군이 무기를 버리고 나왔다고 한다.

가산산성 주변 치열했던 전투 현장은 70년 뒤 평화로운 마을이 됐다. 원당마을, 현방마을의 풍경은 최근 들어 크게 바뀌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계단식 논에 농가가 띄엄띄엄 있던 마을이었다. 분명 개별적으로 지은 집인데 어느새 전원마을처럼 모였다. 관광명소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호국평화기념관에서 체험학습을 나온 대구 계성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군복을 입고 전시된 탱크앞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호국평화기념관에서 체험학습을 나온 대구 계성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군복을 입고 전시된 탱크앞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호국평화기념관

2015년 낙동강변 가까이에 호국평화기념관이란 게 생겼다. 어찌보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의 역할을 넘겨받은 곳이다. 호국정신을 지역 정체성으로 삼는 칠곡군의 랜드마크다. 그도 그럴 것이 낙동강 방어선 최전선으로 장장 55일간 버텨준 곳이다.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됐다. 왜관의 낙동강이 인천의 바닷길을 연 셈이다.

기념관에 들어선 관람객은 다소 충격적인 조형물을 마주한다. 총알이 후두둑 철모 위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미간이 찌푸려진다. 예비군들에겐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철모는 유탄 방지용이다. 정확히 머리로 날아온 총알을 철모는 막지 못한다. 철모의 주인은 분명 전사자다.

1950년 8월과 9월 철모의 주인들은 쓰러졌다. 기념관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인근은 전장이었다. '폭풍'이라는 작전명처럼 북한군은 남쪽으로 휘몰아쳤다. 그러나 왜관을 넘지 못했다. 기념관은 시종일관 북한군이 왜관을 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왜관철교를 폭파하고 다부동, 가산산성 등지에서 버텨낸 기록들을 보여준다.

호국전시관, 전투체험관, 어린이평화체험관 등으로 나뉘어 있다. 선혈이 낭자하는 전쟁의 참상을 아이들에게 과하게 전하지 않으려 애쓴다. 3세 남짓해 보이는 어린이집 원아들에서부터 현장체험에 나선 초등학생까지 평일에도 북적댄다. 성인 3천원, 청소년 2천원, 초등생 1천원의 입장료가 있다.

주말 나들이 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기념관 바로 옆에 소풍 장소로 적당한 벌꿀나라테마공원이 있다. 자전거 라이더들의 경유지 칠곡보, 관호산성 앞 낙동강역사너울길과 왜관철교까지 몽땅 걸어 이동할 수 있을 거리에 모여들 있다.

캠프 캐럴 후문에 몰려있는 경양식 식당들의 메뉴는 대개 비슷하다. 미군을 상대로 시작했던 장사였던 만큼 국내에서 보기 힘든 메뉴들도 보인다.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햄버거, 시내소, 코돈블루.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호국의 다리'라는 별칭이 붙은 왜관철교의 모습. 두번째 경간만 구조가 다르다. 1950년 8월 3일 북한군 전차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시킨 탓이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왜관철교, 호국의 다리

왜관철교에는 '호국의 다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1950년 8월 3일 둘째 경간 63m가 끊긴 데서 붙은 훈장이다. 남하하는 북한군의 전차를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푹신하게 걷기 좋은 인도교다. 주로 걷는 이들이 오가지만 자전거를 타고 건너도 뭐라 눈치주진 않는다. 서로가 인사하며 지나는 시골에서 법령 운운하며 핏대 세울 사람도 없다. 평화롭다. 1905년 열차교량 용도로 준공됐다. 500m가 채 안 되는 길이다. 지탱하는 교각마다 버텨낸 세월만큼 색이 바래있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인사가 됐더라는 '칠곡 가시나들'의 시가 왜관철교 다리에 걸려있다. 한글을 깨친 이들이 정리해 가는 인생사 중 가장 아픈 곳 중 하나는 전쟁이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전쟁은 터져 있었고, 듣도 보도 못한 현실이었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 기억을 글로 풀어 왜관철교 두 번째 경간에 달았다. 1950년 8월, 그리고 한국전쟁이 재생된다. 이들의 표현 몇 줄을 그대로 옮긴다.

'집에 폭탄 맞아서 다 탔다. 집은 좋은 집인데. 아무것도 없다. 먹을 것도 없다. 배급줘서 먹었다. 먹을 거 없어서 있는 집에서 얻어먹고 애 먹었다. 고상 마이 했다. 인민군들이 아이들 결혼할 때 쓸라고 정재 단지에 묻어 두었던 밍주, 삼베 다 파내서 발에 칭칭 감고 돌아다녔다. 생지랄... 끔찍하다. 피란 갔다 와서 애들이 수류탄, 대포 갖고 놀다가 마이 죽었다. 마카 안고 다 울었다' -고상 마이 했다 (박문임, 덕산댁)-

'비행기 폭발해서 인민군이 못 건너오도록 왜관철교를 끊었다. 낮에는 폭탄이 터져서 산에 굴속에서 숨어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밤에는 각산 제실에서 잤다. 전쟁 끝났다고 미군들이 올라와서 손 둘고 북삼 율 2동 집으로 왔다. 옆 동네는 빨갱이 있다고 불질렀다. 지금도 비행기 보면 비행기가 머리우에 뱅뱅 돌고 있는 것 같다' -비행기 (송문자, 각산댁)-

정제됐거나 압축된 시어가 아니다.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이 시를 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 감정이 전해져 먹먹하다. 칠곡 할머니들이 써준 다큐멘터리다. 전전(戰前)세대들의 '배가 고파봤냐', '전쟁을 겪어봤냐'던 눈빛이 어른거린다. 긴 말 대신 한숨에 가까운 '어휴, 참'이라 하고 말았던 이유가 실감난다.

캠프 캐럴 후문에 몰려있는 경양식 식당들의 메뉴는 대개 비슷하다. 미군을 상대로 시작했던 장사였던 만큼 국내에서 보기 힘든 메뉴들도 보인다. 사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햄버거, 시내소, 코돈블루.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별미의 시간, 미군기지 앞 한국인 맛집

왜관읍내에 캠프 캐럴이라는 미군 병참기지가 있다. 1960년 들어선 미군기지다. 농촌마을에 난데없이 미군기지가 왜 들어섰을까. 왜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요충지였다. 지금이라도 거점 내륙 화물기지인 칠곡 물류 IC를 떠올리면 쉽다. 미군 입장에서도 왜관은 보급 창고로 최적지였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캠프 캐럴 주변은 별세계였다. 이곳 후문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형성된 상권에는 먹을거리도 풍부했다. 미군과 군속을 상대로 영업하던 식당은 이제 내국인에게 '맛집'이라는 표창장을 받고 영업중이다. 캠프 캐럴 후문에 줄지어 있는 경양식 식당들이다.

각 식당별로 특색있는 메뉴가 있다. 몰려 있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 돈까스, 샌드위치, 햄버거 등이 조금씩 다른 모양과 맛으로 입소문이 나 있다. 손님은 대개 내국인들이다. 칠곡군도 이 점을 간파했다. 캠프 캐럴 후문 일대를 2022년까지 푸드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줄을 서서 먹는 식당이 두 곳 보인다. 근자에 맛집 공증, 백종원 씨 사진이 보이는 식당을 고른다. 난생 처음 보는 메뉴에 당황할 찰나. 다른 테이블에 많이들 올라와 있는 메뉴를 훑는다. 코돈블루(Cordon blue), 시내소(슈니첼[Schnitzel]을 부르기 쉽게 바꾼 것), 햄버거다. 모두 고기가 듬뿍 들어간 음식이었고 손님 대부분은 먹는 도중 콜라를 주문한다.

줄을 선 또 다른 식당도 염탐한다. 1980년대로 돌아간 인테리어다. 음식에 대한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이럴 순 없다 싶었는데 테이블을 보니 돈까스 일색이다. 돈까스 크기가 한눈에 봐도 보통 성인용이 아니다. 역시나 내국인들로 바글바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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