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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진만(1876~1933) '기명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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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97.5×30㎝, 학강미술관 소장
종이에 담채, 97.5×30㎝, 학강미술관 소장

연꽃이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큼직한 항아리에 꽂혀 있다. 뒤쪽으로 역시 전용의 받침대 위에 물을 담은 그릇이 놓여있고 작은 숟가락이 걸쳐져 있다. 이것은 수중승(水中丞)으로 연적과 같은 용도인 문방구이다. 벼루에 먹을 갈 때 이 숟가락으로 물을 조금씩 떠 넣는 고식(古式)의 연적이다. 화면 제일 아래쪽에는 열매가 달린 비파 가지가 놓여 있다. 골동품 그릇인 기명(器皿)과 꺾은 꽃가지인 절지(折枝)를 같이 그린 그림인 기명절지이다. 누구나 책상 위에 한두 가지 장식품이나 기념물을 두게 되는데 그것을 옛 사람들은 청공(淸供)이라고 했다. 서재의 물건을 그린 정물화인 기명절지는 문방 생활을 하는 주인의 고상한 취향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근대기 대구의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긍석(肯石) 김진만 선생이 그렸다. 선생은 1916년 8월 일본 경찰에 '대구권총강도사건' 주모자로 체포 되었다.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벌인 일이었다. 이듬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8년 3개월 18일을 복역했다. 40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선생의 세 아들과 동생이 모두 항일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선생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24년 출옥한 이후 쉰여덟의 많지 않은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10여 년간이다. 감옥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하에서 살아야 했던 선생은 자신을 일체 드러내지 않는 화은(畵隱)의 삶을 살았다. 기꺼울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은(隱)'이라고 했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은 연꽃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세간에는 멀리 전해지는 향기를 3가지로 꼽는 여러 버전의 경구가 있다.

난향백리(蘭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아무리 짙다고 한들 꽃향기가 백리까지 날아올 리는 만무하지만 여름 연꽃을 보러, 이른 봄 매화를 보러 차를 타고 달려가니 이 말은 턱없는 과장이 아니다. 좋은 그림을 보러 해외까지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가고, 전국에 퍼져 사는 친구들이 동창회에 모여 '주향천리'로 건배사를 하니 둘째 구절도 사실이다. 셋째 구절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다. 어찌 공간적 거리만 따질 것인가. 예술의 향기, 사람의 향기는 시간을 뛰어 넘어 역사가 된다. 7월 30일부터 8월 11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김진만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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