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평] 여성독립군열전/ 신영란 지음/ 초록비 책공방 펴냄

기생들 만세운동 모습.
기생들 만세운동 모습.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잃어버린 자유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는 1만5천454명이다. 이 중 기록된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는 431명 뿐이다. 턱없이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기록되지도 못한 채 잊혔다.

이 책은 남자 못지않게 목숨을 내놓고 국내외에서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고 기록에서 사라진 여성독립운동가 10여 명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상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상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정 시정 받들소냐/ 위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1890년 후반 강원도 춘천 일대 아낙네 사이에서 은밀히 전해지던 '안사람 의병가' 노랫말 일부다. 노래 지은이는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의 대모 격인 윤희순이다. 종갓집 양반집 규수였던 그녀는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마을 부녀자 30여 명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대인 '안사람 의병대'를 조직했다. 의병들의 후원 역할과 함께 직접 화승총과 탄약 등 무기를 제조했고 총검술 훈련에도 참가했다. 1911년 중국에서 의병대 활동을 하던 그녀는 이듬해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인 '노학당'을 세워 최정예 군사를 양성했다.

곤륜산의 여전사 박차정 상
곤륜산의 여전사 박차정 상

◆곤륜산의 여전사 박차정

1939년 중국 강서성 곤륜산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과 조선의용대의 합동작전으로 일본 최강 부대인 5사단을 상대로 펼친 이 전투는 무려 두 달 동안 지속됐다. 여전사 박차정은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장으로 이 전투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무관학교 교관을 지낼 만큼 사격 솜씨가 출중해 전장에서 거칠 것이 없는 그녀였다. 기나긴 공방전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이 여전사는 일본군에게 제1의 표적이 됐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낡은 군복은 피로 물들었다. 치명적인 총상이었다. 1944년 5월 27일, 박차정은 결국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자로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여성독립군열전 표지
여성독립군열전 표지

◆청상의 여걸 조신성

1874년, 조신성은 평북 의주의 부유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3·1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그녀는 북경에 머물고 있었다. 마흔다섯 살의 중년이 된 그녀는 김구, 안창호, 이동녕 선생 등과 더불어 항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듬해 귀국한 그녀는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평안남도 영원, 덕천, 맹산 일대를 중심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명의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 또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독립군의 큰할머니 왕재덕

황해도 출신 왕재덕은 18세에 혼인하여 29세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은 당시 돈으로 2만원 상당의 토지를 유산으로 남겼다. 근면과 절약으로 천석꾼이 된 그녀는 모은 돈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그녀는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1929년 약 10만 평의 토지를 처분하여 '신천 농민학교'를 설립했다. 두 칸짜리 교실과 교무실, 2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기숙사, 아담한 규모의 사택도 함께 지었다. 건물이 완공된 후에는 수원 고등농림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출신 교사들을 초빙하여 40명의 학생들과 같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교육과 실습을 병행하도록 했다. 나이 71세 때인 그녀는 '신천 농업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농사실험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돈 20만원을 추가로 투자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유일의 5년제 사립 농민학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주, 진주 기생들도 만세운동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 국장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고종 독살설은 일본을 향한 국민적 분노를 들끓게 했다. 국장일을 앞두고 월선과 월희를 비롯해 황해도 기생 몇몇이 경성에 왔다. 이들은 탑골공원 앞을 지나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대에 합류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해주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전국적 기생 봉기의 시발점이 됐다. 그해 3월 18일, 진주 장날에 진주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한금화를 중심으로 5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논개의 후예답게 촉석루를 향해 만세 행진을 이어갔다. 북, 징, 꽹과리, 나팔 등 악기를 있는 대로 동원한 악대가 앞장섰다. 기생들의 붉고 푸른 치마저고리가 태극기와 어우러져 시위대는 흡사 무슨 축제를 방불하게 했다. 남녀노소 6천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기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만세운동을 한 한금화를 비롯한 기생 32명을 체포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274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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