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고추 농사가 대부분이었던 고향마을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농한기가 참으로 길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마늘만 심어 놓으면 다음 해 봄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어른들은 땔감이나 준비해놓고 나머지 시간은 '먹기 내기' 등 여가를 즐겼다. 그 여가 선용에 술이 빠질 리가 없었다. 집집마다 노란 주전자 하나씩은 다 있었고, 신작로 막걸리 됫술집으로의 심부름은 우리 아이들 몫이었다. 그 시절, 술을 받아 오면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보지 않은 이 별로 없었으리라.
봉란이네는 막걸리 됫술도 함께 파는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농사일이 바쁜 일철에는 봉란이 부모님은 예닐곱 살밖에 안 된 봉란이에게 점방을 맡기고 들에 가곤 했는데, 이 아이는 나이도 어린 것이 아주 맹랑하고 똘똘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름보다는 똘똘이로 불렀다. 그 만큼 가게 물건도 잘 팔고 계산도 정확했다. 그렇지만 완벽하기만 했던 똘똘이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음주였다. 혼자 가게를 보면서 호기심에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나중에는 몽롱하게 취하는 맛까지 알아버린 것이다.
해가 빠질 무렵, 부모님이 들에서 돌아오면 봉란이는 신작로를 걸어 마실을 나오는데 이때부터 자기와의 눈물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툭툭 털며 일어나는 등 홍수환의 4전5기나 벽에 걸어두던 7전8기(七顚八起)는 저리 가라다. 어떨 땐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면서 무슨 일로 동생까지 업고 나와 마구 뛰다가 엎어지기도 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봉란이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몰랐다. 영양실조인 줄 알고 원기소나 좀 사주라고 했으니 말이다. 술이란 과하다 보면 실수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는 애, 어른을 따로 구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술의 폐해를 온몸으로 보여주던 꼬마 술꾼 봉란이는 좀처럼 술을 끊지 못하다가 아이를 걱정하던 부모님의 용단으로 막걸리를 들여놓지 않으면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로는 봉란이를 보지 못했다. 우리집이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군대 첫 휴가 때 우연히 조우를 하게 된다. 귀대를 앞두고 고향마을을 들렀다가 봉란이를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활짝 피어 있었다. 그녀가 정말 예쁜 것이었는지, 여자에 대한 눈높이가 형편없을 수밖에 없는 군인의 특수 신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예뻤다. 귀대 시간만 촉박하지 않았어도 그 전설적인 술꾼과 대작하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내 여동생과는 동갑내기이기도 한 봉란이는 이젠 나이가 쉰도 훨씬 넘은 중년 부인이 되었겠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아직도 얼굴 빠알간 단발머리 소녀로 남아 있다. 유년시절의 재미있는 추억 한자락을 안겨준 봉란이는 지금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도 술을 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술로 인한 좋지 않은 버릇은 없었으면 좋겠다. 주력(酒歷)으로만 본다면야 이미 주선(酒仙)의 경지에 올랐겠지만.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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