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NS 대화에 쓰이는 이모티콘 한 세트를 거금 2천원을 주고 구매했다. 지금까지 그런 데 돈을 쓰는 것은 감성팔이 상술에 넘어가는 바보짓이라고 생각해왔으니, '거금'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것은 역시 그것이 지니는 대화의 경제성 때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 개의 이모티콘이 더 많은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해주는 것을 누차 경험한 터에 그 매력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백건대, 물론 여기에는 이미 아낌없는 투자로 이모티콘 사용에서 신공(神功)을 자랑하는 지인들에 대한 부러움도 한몫했다.
기실 이모티콘 시장은 이미 3천억원을 넘어섰고, 억대 매출을 달성한 것도 1천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모티콘은 기본적으로 SNS 대화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기호이다. 일상의 대화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을 교환하는 행위이다. 설령 논리의 전달이 목표일지라도 그 대화의 성공 여부는 오고 가는 말들에 묻어 있는 감정의 색깔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상례이다. 상대와의 불화를 이성적으로 풀어보려고 시작한 대화가 감정의 개입으로 갈등의 골만 더 깊어진 경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모티콘의 유행은 사람들이 그만큼 감정의 교환에 목말라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문자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엄지손가락이 아무리 불가사의한 속도로 자음과 모음을 터치하며 감정을 실어 날라도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은 매양 문자의 시체들뿐이다. 그러니 호모 커뮤니쿠스(homo communicus·소통하는 인간)인 인간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비대면(非對面) 대화가 일상이 되어버린 작금의 상황에서 감정의 허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집 마당에 키우는 개에게서도 이따금 그런 허기를 발견한다. 어쩌다 주인을 잘못 만나 거실 소파가 아니라 마당 한 쪽 울타리 속에서 지내는 놈들이다. 모두 세 마리인데, 그중 한 놈의 행동이 재밌다. 놈은 내가 마당으로 내려서면 니가 어디로 가든 나는 관심 없다는 듯이 개집 입구 턱에 고개를 괴고는 미동도 않는다. 그러다가 내 발걸음이 자기 쪽으로 향한다는 판단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득달같이 쫓아 나와 울타리에 매달려 애교를 떤다. 하지만 나는 놈의 그런 행동이 무관심을 가장한 것이라는 점을 늘 먼저 알아챈다. 놈의 눈에 있는 흰자위 때문이다. 흰자위와 눈동자가 형성하는 여백의 구도가 놈의 관심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놈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놈들의 눈자위는 짙은 갈색이어서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흰자위가 없거나 있어도 부위가 넓지 않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사람의 눈은 인종을 불문하고 흰자위가 발달해 있다. 이유가 뭘까?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기능을 함으로써 의사소통의 중요한 보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머리'보다 '마음'의 전달이 생존에 더 필수적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우리 조상들이 그 수단의 하나로 흰자위를 발달시켜 온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모티콘은 상대에게 지금 자신의 마음의 방향을 암시하는 '마음의 흰자위'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모티콘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 호모 센티엔스(homo sentiens·느끼는 인간)의 후예들이 갈수록 일반화되어 가는 비대면 대화 문화 속에서 그것을 대신할 요량으로 개발해낸 도구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 종(種)의 후예이니, 앞으로 이모티콘 구매가 잦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쨌거나 전화비 명세서를 받아든 아내로부터 수시로 핀잔받을 일만 늘어나게 생겼다. 그나저나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라는데, 국민의 대표가 되려는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의 흰자위부터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민의를 대변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유권자들이 알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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