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retro) 유행에 이어 '뉴트로'(new-tro) 열풍이 불고 있다. '새로운'(new) '복고'(retro)라는 뜻의 뉴트로는 '새로움과 낡음', '미래와 오래됨', '신과 복고'라는 상반되는 두 개념이 합쳐져 탄생한 오래된 것을 소환해 현대적 가치를 입힌 개념이다. 뉴트로는 이미 주류를 비롯해 식품, 패션 등 유통을 휩쓸었으며, 이제 건축, 게임, 문화 등 라이프 스타일 등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있다. 뉴트로 상품은 5060, 7080 세대에겐 감성과 추억을 선물하고,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는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중장년에겐 '추억'… 젊은 세대에겐 '새로움'
뉴트로 열풍은 유통가는 물론 라이프 스타일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기성 세대에게는 과거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고, 옛 제품을 경험해 보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함과 새로움을 주고 있다.
평소 개성 있는 옷을 즐겨 입는 고교생 이성수(17) 군은 지난해 12월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흰색 패딩점퍼 때문이었다. 포대자루처럼 펑퍼짐한 모양의 패딩 가슴팍에는 '곰표'라는 예스러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친구들이 '밀가루 공장에 취직했냐'고 놀리기도 하지만 다들 신기하다며 부러워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군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직장인 김학진(29)씨 역시 곰표 패딩을 입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연인과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 출퇴근을 할 때도 어김없이 패딩을 걸친다. 김 씨는 "투박한 포대 자루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참신했다"면서 "특히 패딩에 적힌 '곰표'라는 글자가 예스러운 한글로 적혀 있어서 더 마음을 끌었다"고 말했다.

이 군과 김 씨가 입는 패딩은 국내 대표적 제분 회사인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 곰표가 패션 브랜드 4XR과 협업해 내놓은 옷이다. 밀가루를 상징하는 흰색 패딩에 '곰표' 로고를 크게 넣은 것이 특징이다.
뉴트로 열풍은 주류업계에도 퍼지고 있다. 시작은 하이트진로의 진로이즈백. 2018년 4월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진로이즈백은 1970년대 디자인을 복원해 재해석했다. 두꺼비 캐릭터를 통해 원조 소주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소주병은 녹색병'이라는 편견을 깨고 하늘색 병으로 출시됐다. 젊은 층이 낮은 도수를 선호하는 걸 반영해 도수는 16.9도로 출시됐다.
대구경북 소주 업체인 금복주도 지난해 12월부터 '소주왕 금복주'란 제품을 내놓았다. 1970~1980년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복영감은 낯익은 브랜드다. 당시 소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금복주 아저씨'(복영감)이었다. 소주왕은 금복주 브랜드의 전통성을 계승하고 현대적감각과 트렌디한 감성으로 재해석한 제품이다. 과거 제품과 동일하게 둥근 곡선 디자인을 강조했으며 금복주 캐릭터인 복영감의 모습을 살린 게 특징이다. 이원철 금복주 대표이사는 "소주왕은 주류시장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감성 상품에 대한 소비자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제품"이라며 "'5060세대'에는 그 시절의 향수를, '2030세대'에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비맥주도 캔 제품(355㎖) 'OB라거'를 출시해 뉴트로 열풍에 동참했다. OB라거는 1952년부터 시작된 OB 브랜드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친숙한 곰 캐릭터와 복고풍 글씨체 등 옛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부산·경남 주류업체 무학 역시 뉴트로 감성의 소주 신제품 '청춘소주, 舞鶴(무학)'을 내놨고, 대선주조도 1965년 출시된 '대선소주' 라벨 디자인을 적용한 '대선'(大鮮)을 출시했다.
김수진(22) 씨는 "옛날 소주 같으면서 신제품 같은 느낌도 든다"고 말했으며, 애주가 박영수(62) 씨는 "이전에 출시된 소주보다 도수가 낮아서 자주 찾지는 않지만, 옛날 느낌과 그 시절 생각이 나 가끔 마신다"고 말했다
이경석 금복주 홍보팀장은 "과거에는 취하기 위해 마셨다면 지금은 서로 어울려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으로 소주 트렌드도 바뀌었다"며 "옛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하는 중장년층과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청년층의 요구가 함께 담긴 것이 뉴트로 소주"라고 설명했다.
뉴트로는 '한물간 브랜드' 취급 받던 추억의 패션 브랜드도 되살렸다. 뉴트로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인 어글리슈즈(투박한 모양의 밑창이 두꺼운 신발)의 인기를 이끌어낸 것은 의류 브랜드 휠라다. 휠라는 1998년 출시 모델인 '디스럽터'를 복각해 2017년 '디스럽터2'를 내놓았다.
국내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는 1980년대 당시 '국산 메이커' 신발의 대표주자로 여겨졌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번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1981년 브랜드 출범 당시 썼던 'F' 로고를 다시 가져와 '프로스펙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내놨다.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법한 옛 로고가 큰 인기를 끌자 프로스펙스는 올해부터는 아예 'F'로고를 브랜드 대표 로고로 전면에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LP 음반도 뉴트로 열풍에 가세했다. 점차 사라지던 레코드 가게가 LP판을 찾는 손님이 늘어나면서 곳곳에 다시 생겨나고 있다. LP 음반을 찍는 공장도 바빠졌다. 국내 LP 판매량 역시 지난해 60여 만 장을 기록하며 3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김선연(21) 씨는 "요새는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은데, LP는 조금 더 정성을 들여서 음악을 듣는다고 해야 할까요"라며 LP판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엄경희 올드레코드(대구시 남구 용두길) 대표는 "몇 년 전부터 20, 30대는 물론 중고생들까지 LP판을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아마 디지털 음반처럼 깔끔한 소리는 아니지만 LP판만이 갖는 따뜻한 음질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뉴트로는 당분간 계속될 것"
전문가들은 뉴트로 열풍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제품들이 밀레니얼, Z세대의 마음을 사로 잡는 동시에 부모 세대의 향수까지 자극하며 세대를 잇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은아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통적이고 오래된 물건에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중장년층 세대와 달리 밀레니얼 세대는 신선한 느낌을 받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면서 "요즘 유행하는 컬래버 상품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옛날부터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뉴트로'를 이끄는 세대는 1020세대다. 이들 세대에게 1980~1990년대의 기억은 없다. 본인들이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색다름에 끌려 과거를 뒤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뉴트로는 과거를 파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빌려 현재를 파는 것이다. 즉, 뉴트로는 재현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끝으로 "뉴트로를 통해 중·장년층은 추억과 '향수'를, 젊은 층은 ' 낯섦'을 경험한다. 따라서 이번 뉴트로 열풍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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