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대구문학의 아키비스트 ‘백기만’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주임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주임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주임

백기만은 혁명가이자 시인, 문학의 매개자이자 출판편집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20년대 지역 문단 형성과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항일문학의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독특한 문학 세계관을 지닌 이장희와 함께 근대 지역 문단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역 문단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조명과 연구는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대구문학관의 근대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곳곳에서 언급되는 것을 통해 그의 문학 아키비스트로서의 모습과 중요성을 여실히 엿볼 수 있었는데, 그가 왜 지역의 문단사에서 부각되지 못하고 점점 잊혀졌는지 쉬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았다.

백기만은 1902년 대구 태생으로 아호는 목우(牧牛)이다. 필명으로는 백웅을 썼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17년에는 현진건, 이상화, 이상백과 함께 프린트판 습작동인지 '거화'를 펴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청년들의 문예를 통한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 방향성을 보여주리라 짐작할 수 있는데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편찬한 '고등경찰요사'의 기록에 의해 백기만이 1919년 대구 3·1 만세운동 주동자로 지목되어 검거, 수감된 것을 볼 때 일찍부터 혁명가적 기질이 그에게 이미 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화'는 이후 1920년대 동인지가 문단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고, 이러한 동인지가 당시 문학도들의 문예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인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20년대 초반 백기만은 이일우의 협조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면서 많은 문우들과 교우를 맺으며 여러 시인과의 매개자적 면모를 갖추어 갔다. 대학 중퇴 후 조기귀국을 하였는데, 대구문학관에서 수집한 그의 친필 엽서를 통해 그 이유가 금전적 문제였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귀국 후 유학 당시 연을 맺은 양주동, 유엽 등과 주축이 되어 동인지 '금성'을 편찬했으며, 3호 편찬에 앞서 이장희와 이상백을 동인으로 편입시키면서 시인으로 등단시키기도 하는 등 '창조', '폐허', '백조' 등과 함께 1920년대 동인지 문단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문인들 간의 가교 역할을 하였고 '개벽', '여명' 등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조선통신중학관에서 1920년대 초기 시인들의 작품을 묶어낸 최초의 근대시인선집인 '조선시인선집'을 편찬하면서 편집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지만, 1929년 '고월 이장희의 유작 시화전' 및 '추도회'를 끝으로 더 이상 창작활동은 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는 편집자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여 이상정 장군의 유작을 모은 '중국유기'와 이상화와 이장희의 유고 작품과 회상록을 엮은 '상화와 고월', 경북 작고 예술가 평전 '씨뿌리는 사람들', 잡지 '문학계' 등을 편찬하였다. 이는 동시대를 함께한 문우들의 작품을 수집, 기록하여 보존하고 기리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문학아키비스트로서의 활동과 결과의 산물이었다.

시인, 매개자, 편집자로서의 모습과 함께 당대 문우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함께 활동한 기억을 기록하여 지역의 근대문학 형성에 일익을 담당한 그의 활동이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연구되어 지역문화예술계에서 제대로 평가 받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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