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 <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학과 교수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마지막 부분에서 살내 유래를 설명했다. 즉,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양 진영에서 쏜 화살로 하천이 화살로 가득했다 하여 유래된 살내(전탄)에서 왕건 군대는 승기를 잡고 견훤 군대를 추격하게 된다. 전황(戰況)이 반전된 것이다. 추격을 하면서 왕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 지역 경계에 태만함이 없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무태'(無怠)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의병장이었던 태암 이주(李輈)의 충절을 기릴 목적으로 인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환성정의 '환성정기'(喚惺亭記)에 무태 지명 유래와 관련한 문구가 있어 흥미롭다. '동즉려조지토견훤시경군왈무태자야'(洞卽麗祖之討甄萱時警軍曰無怠者也)가 바로 그것이다.

무태를 지나 연경동을 통과할 때, 경전을 읽는 선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 이곳 지명이 '연경'(硏經)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경동은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인 연경서원이 1563년 건립된 곳으로 교육도시 대구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후 왕건 군사와 견훤 군사는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파군(破軍)재로 유인한 견훤 군사에 의해 왕건과 그의 군사는 괴멸된다. 그래서 파군재 지명이 유래하게 된다. 파군재 전투에서 위기감을 느낀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은 왕건을 살려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여기서 생겨난 지명들이 왕산(王山)과 지묘(智妙)동이다.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의 기묘한 지략으로 왕건을 살린 곳이라는 의미다.

이제 왕건으로서는 사지를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왕건은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기 시작한다. 홀로 앉아 퇴로를 궁리했던 바위로 동화사 부속 암자 염불암 뒤편에 위치한 일인석(一人席), 홀로 앉아 쉬어 갔다는 봉무동의 독좌암(獨坐岩), 전쟁 통에 노인과 부녀자는 숨어 버려 노인을 볼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유래된 불로(不老)동을 거쳐, 평광동에 이른다. 여기서 나무꾼으로부터 얻어먹은 주먹밥의 힘으로 간신히 초례봉(醮禮峯)을 넘는다. 나중에 나무꾼이 그때 자신이 준 주먹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왕건임을 알고 이곳에서 왕을 잃어 버렸다고 하여 실왕리(失王里)가 되었고, 지금의 평광동 시랑이다. 물론 견훤 군사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왕건을 놓쳤으니 그 또한 실왕리가 된다고 하겠다. 초례봉은 왕건이 천지신명님께 기도를 드린 곳이라는 기록이 고문헌에 남아 있다. '초례'는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

초례봉을 넘어 견훤 군사의 추격으로부터 멀어지자 마음이 안정되어 길을 걸었던 곳이 지금의 안심(安心)이다. 마음이 진정된 상태에서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떠 있어 반야월(半夜月) 지명이 유래된다. 율하천을 따라 내려오던 왕건은 금호강 팔현습지에서 강을 건너 앞산으로 숨어들었다. 앞산 큰골의 은적굴(은적사)은 왕건이 앞산에서 처음으로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그 후 안지랑골로 이동하여 안일암에서 잠시 쉬게 된다. 그때 견훤은 왕건을 찾아 이곳 안지랑골까지 오게 되니, 왕건은 다시 안일암 위쪽으로 피신하여 왕굴에 숨는다. 그때 거미들이 떼를 지어 와 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 군사가 굴 내부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굴 역시 왕건이 잠시 피했던 곳에서 유래된다. 잠시 후 산을 넘어 앞산 달비골에 위치한 사찰에서 며칠을 피신하여 편안히 지내니 그 절 이름이 임휴사다. 이처럼 지역에는 공산전투와 관련한 많은 흥미로운 지명들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그때의 처절했던 얘기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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