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형님의 요절로 그렇게 찬바람이 불고 간 2년이 지난 뒤, 우리 집에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의 봄소식이 전해왔다.
당시 마흔을 넘긴 우리 어머니의 임신소식이었다. 형을 잃고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도 저승에 간 형과 같은 아들을 다시 얻을 수 있으리라는 염원이 이루어 진 것이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더 없는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형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리라는 환생의 기대였으리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 할매요! 우리 맏손자 같은 아들이 다시 태어나길 점질해 주이소!"
어머니의 임신소식을 들은 후 할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정안수 떠놓고 삼신할미께 빌고 또 빌었다.
당시 할머니 방 북쪽 구석 위 쌀바가지에 창호지를 덮어 흰 실타래로 묶어 놓은 삼신 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해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햅쌀을 찧어다가 바가지에 담아서 새하얀 창호지로 포장해 모셔 두곤 했다.
그 삼신 바가지는 당시 할머니에게는 괴로울 때 의지하며 소원을 비는 유일한 신앙이었다.
나는 할머니 방에서 같이 기거했기에 그 당시 할머니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매일아침 이른 새벽이면 정안수 떠놓고 삼신할미께 죽은 손자가 다시 태어나서, "할매! 나 여기 왔어!"라고 소리 칠 것만 같은 생각에 환생을 빌고 또 빌었다.
그날부터 우리 집은 한줄기 빛이 들어오고 생기가 감도는 봄날이었다.
할머니께서도 동네 출입도 하고 밭에 나가 일도 거들며 예전과 같이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울러 아버지와 어머니도 더욱 더 농사일에 몰두했으며, 겨울에 태어날 동생이 형의 전생인 아들이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우리 집은 그렇게 형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에 들떠 있었고, 해산달인 동짓달이 찾아 왔다. 물론 할머니의 정성은 날이 갈수록 간곡한 기도가 계속되어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해산일이 다가와 할머니가 직접 분만을 돕는 날이 왔다. 부엌에 가서 가위와 실을 끓는 물에 삶아 소독을 하고 해산준비에 바빴다.
"응애! 응애!"하고 우렁차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밖에서 아버지와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마음을 졸이는 찰나였다.
"00이가 딸아이로 태어났다! 휴 - 우!"
할머니의 목소리엔 가느다란 한숨이 서려 있었다.
"우짜겠노? 삼신 할매가 점질해주신 것을…!"
"00 못지않게 잘 키워야제!"
이날부터 할머니는 새로 태어난 막내둥이 손녀를 손자 못지않게 키우는 데 올인하였다.
속담에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듯이, 죽은 형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 막내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비록 아들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엔 충분했다.
초등학교 가기 전 유치원도 없던 시절에, 한글을 줄줄 읽을 줄 알았고, 당시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알고, 천자문까지 줄줄 외우는 등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6학년 졸업 때까지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일기장을 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써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그것뿐인가?
교내 백일장과 성적 우수상을 독차지하였고, 할머니께 상장을 한 아름씩 안겨주어, 형의 슬픔을 막내 손녀로 인해 대리만족하는 즐거움으로 여생을 보냈다.
아마 그것은 삼신할미께 우리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결과였었으리라!
그렇게 세월은 흘러 막내 여동생은 학교에 입학하여, 초·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돌아가신 형이 다니던 경북대 사범대학을 나와 그 해 중등교원 임용고사에 합격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들 딸 두 남매를 낳고, 현재는 구미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한 가지 제일 아쉬운 것은 할머니가 장수하셔서 지금의 막내 동생이 돌아가신 형의 몫까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이것은 오직 돌아가신 할머니의 지극정성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 의문부호가 남는다.
형의 요절로 우리 집안은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동네에서도 그 집 장손이 죽었으니, 대들보가 부러졌다고 수군수군 야단들이었다.
흔히 남의 말 하기 좋다고 새집을 짓고 나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귀신이 맏손자를 데리고 갔다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집 할매가 손자자랑을 그렇게 하더니만…. 쯧쯧"
별소리가 다 들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할머니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동네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어머니는 굿집을 찾아다니며 사흘간이나 무당을 불러 액을 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 남은 우리 동생들을 객지로 유학 보내는 것을 포기한 듯 했다.
나도 형님이 그렇게 되고 보니, 한창 사춘기인 나는 공부가 되지 않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3인 나는 입시공부를 포기하다시피하고 못난 친구들과 어울렸다. 못 먹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하루는 혼자 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못된 짓만 배운다."
동네 친구들까지도 그런 나를 왕따 시키고 잘 놀아주지도 않았다.
당시 그런 일만 없었다면 고등학교도 대구로 보내 형과 같이 공부하도록 준비하던 터인데,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 앞에 불려갔다.
"대구유학은 포기해라! 나하고 촌에서 농사나 짓자"고 권유를 해서 인근 면에 있는 농고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삼십리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대구로 유학가고 공부 못하고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이 모인 학교였다. 그리고 농업학교라서 전 과목 중 농업과목이 60%였다.
도작, 전작, 가금, 축산, 원예, 농산가공 등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농업전문 고등학교였다.
또한 실습이라고 해서 모심기, 보리 갈기, 양계, 양돈 등 실습위주로 일을 시키는 시간이 많았다.
국·영·수 인문과목은 40%이고, 쉬는 시간에 공부 좀 한다고 책을 보고 있으면 못된 친구들이 훼방을 놓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밥을 먹고 30리 길을 자전거 타고 통학하니 공부시간에는 잠밖에 오지 않았다.
그런 학교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래도 돌아가신 형님은 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경북대에 들어갔으니 동네에서는 천재라고 했었다.
그 당시 이 학교에서는 못된 학생이 많았다. 체육관에 다닌다면서 권투를 배운다고 주먹깨나 쓰는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려 파출소에 끌려간 학생들도 비일비재 했다.
고1 때 어느 날이었던가?
점심시간에 내 자전거가 고장이 나, 고치려고 있는데, 3학년 깡패 같은 두목이 나를 부르더니, 남의 자전거 부속을 훔친다고 고3 교실로 끌고 갔다.
대뜸 나를 벽에 세워놓고 권투 샌드백 치듯 나의 배를 가격하였다.
나는 숨도 못 쉬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어 보니까 고향마을 선배가 나를 일으켜 구해주었다. 나와 함께 잡혀온 다른 친구들은 등에 업혀서 나갔다고 했다.
하루는 아침 전교생 조회시간에 난리가 났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깡패 같은 학생들을 나무랐다고 그 중 두목 학생이 훈육선생님을 철봉대로 휘둘러 나중에 퇴학까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그 때 왜 이런 학교에 진학을 했는지 후회를 많이 했지만,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더욱 힘든 일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나 공휴일에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거들라고 해서 집안일 거들기에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 가을 날 볏단을 지게에 한 짐 지고 나르는데 지게를 넘어뜨려 나락이 땅에 떨어져 아버지께 꾸중을 듣던 일이며, 일하기가 싫어서 몸이 아프다고 핑계대고 이불 덮어쓰고 꾀병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집에서 학교까지 자전거 통학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중에는 못된 친구가 있어 중간학교를 하는 날도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길을 가로막으며 훼방을 놓는 바람에 중간학교를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모여 화투놀이, 동전치기, 만홧가게나 하교 때는 여고생들과 어울려 뒷골목을 쏘다니며 극장구경 등 나쁜 짓은 도맡아 놓고 했다.
옛말에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었으니, 대학가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세월은 흘러 3학년을 졸업하니 마땅한 대학은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상주에 있는 2년제 대학에 시험을 쳤으나 보기 좋게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결국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로 했다. 그해 이른 봄 보리밭에 김을 매고 있을 때였다.
사진1=필자의 가족 사진. 필자의 처와 1남 2녀.
사진2=필자의 막내여동생 대학 졸업사진.
사진3=필자의 막내여동생 졸업식. 필자의 첫째 여동생, 막내여동생, 필자의 첫째딸, 필자의 첫째 여동생 딸(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