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획시리즈]<4>독도지킴이 안용복에게서 배운다

조선 땅 울릉도·일본 땅 죽도
관복을 차려 입고 일본으로 간 안용복

①독도를 지켜낸 '안용복 바로 알기' 전문가 좌담회

②독도 수호일지-일본으로 끌려간 안용복

③독도 수호일지-일본과 한국의 소리 없는 싸움

④독도 수호일지-또 다시 일본으로…독도를 취하다

⑤한국 속의 영웅·일본 속의 허풍쟁이

1695년 막부의 질문에 돗토리번에서 보낸 답변서.
1695년 막부의 질문에 돗토리번에서 보낸 답변서. '울릉도가 어디 땅이냐'는 물음에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는 이나바와 호키(현재의 돗토리현)에 속하는 섬이 아니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독도재단 제공

부산에 도착했지만, 안용복과 박어둔은 곧바로 풀려나지 못했다.

대마도와 조선의 사신이 만나기 전까지 중요한 증인으로 왜관에 갖혀있던 탓이다.

1693년 11월 2일 대마도 측 교섭 사신인 타다 요자에몽과 함께 입국해 보름여가 흐른 12월 10일쯤 안용복 등은 겨우 조선 관청에 넘겨졌다.

조선은 타다 요자에몽에게 "우리는 위험 때문에 백성들의 울릉도 항해도 막는데 왜 귀국의 령인 죽도까지 사람을 보내겠나. 이후 법을 더욱 엄격하게 하여 양 국 백성들의 쓸데없는 충돌을 막자"는 뜻의 서한을 들려 보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 땅 울릉도, 일본 땅 죽도'로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두 섬을 구분해 문서에 담았다.

울릉도의 명확한 지배력을 주장하면서도, 일본과 마찰은 벌이고 싶지 않다는 의중이다.

일본은 조선 측의 문서에서 '울릉도'란 단어를 삭제하기 원했고, 조선은 수정을 전면 거부했다.

그렇게 팽팽히 대립하던 양 측의 신경전은 1696년 1월에서야 겨우 끝을 맺는다.

막부는 노중들이 모인 회의를 통해 "죽도에 우리 일본 사람이 거주한 일이 없고, 지리를 따져보면 이나바(지금의 돗토리현 동부)와 160리, 조선과는 40리 정도라 일찍이 저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쓸모없는 작은 섬이 원인이 돼 이웃나라의 호감을 잃는 것은 득이 없으니 앞으로 우리 사람의 고기잡이를 금하는 것이 옳다"는 봉서를 작성하고 그해 1월 18일 대마도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대마도로써는 무척 난감한 것이었다. 막부의 지시를 받고 이행하지 못한 무능함과 조선에 굴복해버린 자존심이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결국 대마도는 이 문서 내용을 조선에 전달하지 않고, 은근슬쩍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는 식으로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다.

이렇게 양 국의 외교가 일단락될 때 쯤, 안용복은 어머니가 계시던 울산으로 내려왔다.

국법을 어긴 죄로 부산 관청에서 곤장까지 맞고 풀려난 터였다.

도무지 울분이 가시지 않던 안용복은 평소 알고 지내던 뇌헌 스님과 모여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저놈들이 아직도 울릉도를 자기네 것이라 하고 있으니 이게 될 일이요. 아직도 그놈들 때문에 맞은 엉덩이가 후끈거리는구만"

"그럼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떤가. 우리가 정말 조선 관원으로 꾸미고 가 이놈들을 꾸짖는 거지. 분명 저 교활한 대마도가 중간에 꼈으니 될 일도 없을테니 겸사겸사 그들의 흉계도 일본 조정에 알리는 걸세"

1696년 안용복과 뇌헌 스님 등이 관원을 사칭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항해 루트. 독도재단 제공
1696년 안용복과 뇌헌 스님 등이 관원을 사칭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항해 루트. 독도재단 제공

1696년 3월 안용복과 뇌헌 스님 등 11명은 또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배에는 관복이며 영유권 증명 문서가 가득했고, 선수에는 조선 관청의 선박임을 알리는 깃발도 달았다.

약 2개월 여의 항해 끝에 울릉도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일본 선박들이 여럿 눈에 띄였다.

"이 놈들. 왜 자꾸 남의 땅에 넘어와서 도둑 어업을 하는게냐! 어디 상단 소속인지 냉큼 신분을 고하라!"

관복과 방갓을 두른 안용복이 서슬 퍼렇게 추궁하자 일본 어민들은 "우리는 그저 죽도에 잠시 넘어온 것 뿐입니다. 저 옆 송도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 결정이 내려졌으니 궁색하게 마련한 변명이다.

막부의 봉서가 조선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안용복으로서는 일본의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변명의 말을 들은 안용복은 분통이 터질 따름이다.

"네 놈들이 말하는 송도라면 바로 옆 독도가 아닌가. 그 곳도 우리 땅이 분명할진데 무슨 해괴망칙한 소리냐"

독도로 넘어간 안용복 일행은 일본 어민들이 강치를 잡아 기름을 끓이던 가마솥을 발로 차 엎어버리고 곧장 돗토리번으로 쳐들어 갔다.

거기서 수석 가로(번의 대신 중 가장 높은 직책) 아라오 오오카즈를 만나 "울릉도든 독도든 다 우리 땅인데 왜 자꾸 일본인이 넘어오느냐"며 힐난한 후 대마도의 무성의하고 이기적인 정책을 비난하는 고소장을 작성해 제출했다.

2차 도일 당시 선박에 게양한 깃발 복원도.
2차 도일 당시 선박에 게양한 깃발 복원도.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조선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의 세금을 담당하는 장수 안 동지의 깃발)'라 적혀 있다. 독도재단 제공

안용복은 당시 일본 조정에 제출한 고소장에서 자신을 '3품 감세장(세금 등을 걷는 관리) 안 동지', 뇌헌 스님을 '금오승장석씨(의금부에 근무하는 스님 장군) 헌 판사'라 썼다.

조선 관리들이 이처럼 대거 쳐들어오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당연히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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