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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아비불립(我碑不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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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我碑)는 나의 비석이고, '불립'(不立)은 세우지 않는다. '나의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유언에서 유래했다. 퇴계는 경북 안동출신이며 영남학파의 태두로 성리학자(性理學者)요,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이다.

1534년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며, 박사 전적(典籍)을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1546년 임소이탈로 직첩(職牒)이 박탈되어 야인일 때 두 번째 부인과 둘째 아들을 잃고, 이어서 친형 이해(李瀣)를 사화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1552년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지만 신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그 후에 대사성 춘추관 수찬(修撰) 등 30여 차례 제수를 받고 잠깐씩 지낸 뒤 향리로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퇴계의 사상은 정이(程頤)와 주희(朱熹) 철학을 바탕으로 마음(心)현상은 감성적 측면의 기(氣)와, 이성적 측면의 이(理)가 합해 있다고 했다. 지행(知行)이란 사람의 두 다리,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처럼 나란히 나아가는 지행병진(知行並進)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성(性)은 곧 이(理)라는 전제로 이동설(理動說)을 말하고 이(理)가 기(氣)에 앞서 존재한다는 이우위론적(理優位論的)입장을 취했다. 이는 곧 이(理)와 천(天)과 인(人)간의 합일(合一)로 실생활 속의 구현이었다. 즉 이와 천의 합일은 우주자연 질서와 하나 되는 일치를 말한다. 퇴계의 이런 학문적인 업적은 퇴계학파(退溪學派)와 율곡학파(栗谷學派), 또는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로,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학파를 형성했다.

퇴계는 한양에 있을 때 서성문(西城門)에 우거(㝢居)했는데 정성 성(誠)자를 기본으로 일생동안 공경할 공(敬)을 실천하고, 이어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정성으로 공경하는 생활의 일면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살고 있을 때 뜰을 거니는데 집 앞마당에 알밤이 뚝뚝 떨어졌다.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담 너머로 뻗어와 탐스럽게 익은 밤알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자 퇴계는 그 밤을 주어 담 너머로 훌훌 던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저절로 떨어진 밤인데 그냥 주어서 먹으면 되지 구태여 담 너머로 던질 게 뭡니까?"

"허허, 내 앞마당에 떨어졌어도 엄연히 임자가 있지 않소? 밤을 주어먹다 맛 들여지면 나중에 나무에까지 올라갈지도 모르지 않겠소."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때 교육사업에 뜻을 두었으며,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심(專心)을 다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임종할 때 가족들에게 차분히 일렀다. 내가 죽거든 첫째, 예장(禮葬)을 사양한다. 둘째, 나의 비석을 세우지 말라(아비불입我碑不立).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만 쓰라'고 당부했다.

이은보감(二恩寶鑑)에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이 비석보다 낫다고 했다.

1571년 2월에 퇴계 사숙이 소천(召天)하자 이웃마을까지 고기를 먹지 않고, 전국 각지의 사대부 300여 명이 가심을 기렸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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