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장유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남편 헌영과 귀여운 아들 정빈이 있고, 넉넉하진 않지만 별 탈 없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세 가족. 불행이 그들을 엄습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빗길에 미끄러진 25톤 화물차가 도로 중앙선을 넘어 남편 헌영을 덮친 것. 그는 죽지 않았지만 아마도 깨어나지 못할 것이고 깨어난다 하더라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에 대한 원망 때문일까. 유라는 길을 걷다 불행을 모르는 듯한 얼굴들을 보면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한다. 왜 당신들은 불행을 모르느냐고 공격하고 싶은 비틀린 기분이 된다. 재취업 과정에서 지인들에게 일자리를 요청하기 위해, 엄마에게 아들의 돌봄을 부탁하기 위해 자신의 불행을 파는 것도 대수롭지 않다.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던 유라는 이사할 집을 구하러 가던 중 우연히 '화물 연대' 푯말이 붙은 집회 현장을 지나게 된다. 업주의 강압에 의한 과적 실태와 위험성을 고발하며 "우리도 더 이상 도로 위의 폭탄이 되기 싫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남편을 덮친 화물차 운전자를 떠올리며 원망과 연민이 뒤섞인,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저기 있을까, 그 사람도. 과적으로 늘어나고 빗물로 늘어난 제동거리. 만약에 그 제동거리가 조금만 짧았더라면, 운전자가 핸들을 조절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p.53)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 속 이야기다. <피프티 피플>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소설 속에는 모두 50명(정확하게는 51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여느 소설들과 달리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달리 말하면 50명 모두가 주인공인 셈이다. 인물의 이름들로 구성된 각각의 장(章)들은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개개인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늘 같은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곳에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병원의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머지않은 미래에 차별 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삶을 꿈꾸는 김성진이 있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큰 누나와 조카를 잃고 방황하는 한규익이 있다. '베체트 병'이라는 희귀성 염증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재즈 바 사장 조희락이 있고, 책과 사서(司書) 일을 사랑하지만 계속된 비정규직 신세에 지쳐 다른 직업을 선택한 김한나가 있다. 초등학생부터 70대 중반까지, 직업도 천차만별인 이 50명의 다양한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나와 닮은 모습을 한 명 정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개개인의 독자적인 삶을 조명하면서도 결국에는 사람들 간의 연대와 화합을 추구한다.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網)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한다. 이 메시지는 각각의 장(章)들이 한 개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도 인물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특징에서 잘 드러난다. 때로는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이웃의 모습으로. 그런 탓에 앞서 나왔던 인물이 다시 등장할 때면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하며 책의 앞장을 다시 들춰보게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사람과 사람은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좌우 이념적 대립부터 계급·자본 등의 수직적 대립까지 갈등과 분열로 가득 차있다. 심화되는 경쟁 구조 속에서 점점 설 곳이 좁아지는 탓에 '우리'보다는 '내' 자리, '내' 일, '내' 집이 먼저인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테다. 그뿐 만인가. 나와 다른 누군가를 무분별하게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상대의 사정이 나와는 별 상관없거나 혹은 걸림돌이 되니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는 혐오라는 손쉬운 방식을 택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차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6월 '차별금지법'이 8번째 시도 끝에 겨우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전염병을 겪으며 사람들 사이의 경계는 한층 더 두터워졌다. 마스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 타인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두고, 혹여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가해자가 누구인지 낙인찍기 바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피프티 피플>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다시 갖게 해준 단비 같은 소설이었다. 어떠한 판단이나 선입견 없이 사람들의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큰 틀로 '연결'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지만 이타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잠시나마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연말이 되기를 소망한다. 50명의 안녕을, 그리고 5000만 국민들의 안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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