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진숙의 영국이야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한 나라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은 꾸준히 변하지 않는 나라다. 500년 전의 거리가 지금과 똑같고, 백화점과 서점이 수백 년째 그 자리에 있고, 1950년대 검정색 택시가 아직도 런던거리를 달린다. 영국인은 새것을 경시하고 옛것을 우대한다. 이삼백년 된 집을 고쳐가며 살고 골동품을 자랑스러워한다. 물려받은 물건을 다시 물려주고, 낡은 가구와 손때 묻은 찻잔을 그대로 사용하고, 반세기가 지난 연속극을 지금까지도 즐겨본다. 속도가 미덕인 오늘날에도 시간을 들여 꽃을 가꾸고 손으로 쓴 카드를 주고 받는다. 심지어 여름휴가도 매년 같은 곳으로 간다.

시골은 더욱 변함이 없다. 30년을 드나들던 노천시장이 여전히 북적거리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빌리지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고층건물이 없고 꽃과 나무가 많은 시골은 마치 아름답고 정교하게 꾸며진 공원 같다. 집은 작은데 공원은 크다.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공평하다. 넓고 푸른 들판에 흰 양떼가 참으로 평화스럽다. 오랜 세월 묵묵히 가꾸어온 덕분이다.

세월을 뛰어넘는 고풍스러운 풍경을 지닌 코츠월드(Cotsworld) 지방은 영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수백 년 된 집에 살고 무너진 돌담의 돌을 다시 쌓아올린 덕분이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영국으로 몰려온다. 유서 깊은 건축물과 옛것을 보관해놓은 박물관에 감탄하고, 영국식 정원과 차 문화에 열광한다. 전부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거부하며 옛 것을 보존한 덕분이다.

영국인은 '예측가능하고 안정된 삶'을 꿈꾼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기'보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기'를 좋아한다. 삶의 여유를 만끽하며 느긋하게 살기를 바란다. '영국인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에 필요한 물건은 손가방, 머그잔, 티 타월, 선탠용 접이의자, 책'이라니, 행복이 놀랄 만큼 단순하고 쉽다. 구식자동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다. 강에서 보트를 타고, 아빠와 아이가 낚시를 하고, 오리들에게 빵을 던져준다.

개와 함께 산책하고, 정원을 가꾸며, 하루에 두 번은 차를 마신다. 노부부가 접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엄마가 벤치에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아이들이 잔디밭에 둘러앉아 재잘재잘 떠들고, 가족들이 담요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집으로 친구를 불러 소시지를 굽고 웃고 떠든다. 그들은 바꾸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하다.

'수세기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인간의 행복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변하지 않았다.(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라는 말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인생은 꼭 뭔가를 이루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고, 행복은 갖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고 상기시킨다. 큰 기쁨만 쫓으려 하지 말고,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기쁨과 만족에 눈을 돌리라고 한다. '행복해지는 최고의 방법은 행복해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가르쳐준다.

영국인은 '영감(inspiration)'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데, 나는 영국에 가면 '평화'와 '행복'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떠오른다. 크고 웅장한 나무들, 고즈넉한 골목, 띄엄띄엄 놓여있는 낡은 벤치가 익숙해서 좋다. 집집마다 걸려있는 꽃바구니, 오후의 차 한 잔, 손으로 쓴 카드가 아늑해서 좋다. 늘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이 따스하게 마음을 어루만진다. 급격하게 변화하고 갑자기 달라지는 곳에서는 막막하고 불안하지만, 천천히 흘러가며 변하지 않는 곳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안정감을 준다.

삶이란 본래 자질구레한 거다. 인생은 그런 삶들이 오래 누적된 거다. 오래 공들여 가꾸는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게 있던가. 어디에나 있는 것에도 기쁨이 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에도 기품이 있다. 매일의 식사, 하찮은 집안일, 특별할 것 없는 생활 속 대화 같은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진짜 삶이다. 그런 작고 평범한 일상이 실은 경이로운 거다. 오래된 삶의 방식은 뻔하고 진부한 게 아니다. 그건 긴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인정받는 인생의 지혜이자 답이다. 영국이라는 낯선 나라가 은근히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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