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9월 17일 추석날. 난데없는 물벼락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 동쪽을 쓸었습니다.
울진의 근남·기성·온정·평해도 다 잃었습니다.
으스러진 초가집마져 둥둥 떠내려갔습니다.
"땅 줄 테니 울진 사람들 철원으로 오시오"
이듬해 4월 7일, 오갈데 없는 66세대 3백여 명이
군 트럭으로 3박4일 눈물로 달려 도착한 곳은
전쟁통에 버려진 휴전선 아래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땅.
정호남 할머니(88)는 그때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가져온 건 고추장 항아리와 도끼 한자루.
보이는 건 휑한 벌판에 덩그렁 한 군용 천막 뿐.
구들을 놓고 가마니를 장판으로, 모포 한 장으로
다섯 식구가 칼바람을 피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지원 약속도 식량 배급도 물거품.
주린 배를 소나무 속껍질로, 풀뿌리로 채웠습니다.
오늘을 넘기면 내일이 또 보릿고개였습니다.
탄피 한 관(3.75㎏)에 보리쌀이 세 말.
모진 단속에 주운 탄피를 속옷에 숨겼습니다.
쉰 살도, 예순 살도 임산부처럼 시장가서
출산(?)하고 바꾼 보리쌀로 식구를 살렸습니다.
지뢰 반 흙 반인 황무지를 호미·괭이로 일궜습니다.
조별로 땅을 공동 개간해 제비뽑기로 나눴습니다.
정부 지원군 열집 당 1마리, 말귀도 모르던
부림소는 마을 다랑논 최고 용병이었습니다.
악으로 깡으로 일군 20여 년. 또 날벼락이 쳤습니다.
1982년 수복지역 특별조치법에 따라
너도 나도 '땅 임자'라며 쑥쑥 내민 종잇장에
주민들은 개간 농지 70%를 뺐겼습니다.
이주 마을 첫둥이 이상경(61)씨도 그 시절이 생생합니다.
타지서 기죽지 않으려니 억세고 드세졌습니다.
학교 가면 싸움을 하고서야 수업을 했습니다.
버스 타면 시끄럽다고 '솰라쟁이'로 통했습니다.
면민 체육대회는 언제나 결승, 마을 잔칫날이었습니다.
비가 와서 쉬는 날은 남을 따라 잡는 날.
왜 안오냐며 쨍한 하늘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아내는 이런 남편만 보고 경주서 시집왔습니다.
전 재산 버섯사가 두번이나 불타고도 이를 물었습니다.
밤중에 손을 씻고 새벽에 또 장화를 신었습니다.
돈이 모일때 마다 '눈물의 그 땅'을 다시 사들였습니다.
벼, 옥수수, 노지 오이, 시설 오이, 버섯, 토마토….
마침내 십수 년 공들인 파프리카가 대박났습니다.
이 씨 부부는 1만6천500㎡(5천평)에 연 조수익(粗收益) 8억원.
마현리 132가구 연 평균 조수익 3억원….
일본도 알아주는 파프리카 부자마을, 어려운 이웃에
매년 수백만원씩 내 놓는 의리 있는 동네가 됐습니다.
태풍에 싹 쓸리고 잡초 벌판에서 끝내 희망을 찾은,
질경이 같은 한민족 DNA를 보여준 철원 경상도 마을.
은근과 끈기의 한민족이라 했습니다.
코로나19보다 더한 IMF, 6·25도 헤쳐온 우리입니다.
포시랍게 자라는 시대라지만 피는 못 속입니다.
힘들면, 부모세대가 물려준 그 DNA를 떠올려 볼 일입니다.
마을 어귀 입주 기념 비문은 그 교훈을 일깨웁니다.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조상들의 숭고한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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