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우리 학과의 특별 강연에 소설가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문학포럼이라는 이름의 그 강연은 매 학기마다 관련 직종 종사자나 작가들을 초청한다. 내 기억 속의 강연은 항상 소박했다. 그 시절 내게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인 수많은 작가님들에게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을 쌓을 만큼 다정하고 소탈한 자리였다. 꼬꼬마 시절의 이나리는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앉으리라 다짐했었다.
그 오래된 다짐이 이루어진 건 꽤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나름대로 금의환향이라 들뜬 기분이기까지 했다. 대단한 유명인사가 아니니 자기자랑 같은 말은 낯간지러워 준비하지 않았다. 되도록 멋있는 말은 하지 않으려 자기검열을 철저하게 했다. 대신, 소박한 분위기의 소탈한 대화를 기대했다. 취업한 학과 선배에게 쏟아질 후배님 질문을 상상했고, 그에 맞춰 대비했다.
그런데 내 들뜬 기분은 무대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문학포럼 무대는 아담한 소형 강의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서야 할 곳은 대형 강의실의 무대였다. 코로나 시국의 거리두기를 위한 조치였다는 사후 설명이 있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는 너무 컸다.
학생들과의 실제적 거리가 먼 탓에, 심리적 거리는 100m쯤 되었다. 우리 사이에 대화는 불가능했다. 미리 받은 질문지를 통해 일방적인 답변만 반복해야 했다. 나는 예상 못한 진행 방식에 당황하여 고장난 것처럼 버벅거렸다. 눈앞에는 수십 개의 질문지가 아른거렸다. 학과 선배, 관련 직종 종사자, 첫 책 등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의 질문들 사이에 유독 위화감을 뿜어내는 질문이 대여섯 개 보였다. 모두 같은 질문이었다.
"MBTI를 알려주세요."
유행이라 말하기도 머쓱할 만큼 서로의 MBTI를 확인하는 일이 흔해졌다. MBTI는 심리유형검사로 총 16개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16분의 1이라니. 정확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나 때는 혈액형으로 서로의 성격 유형을 구분했다. B형인 나는 항상 A형으로 오인받곤 했다. 친구들은 내게 신중하고 소심한 A형이 틀림없다고 장담했다. (자기중심적인 B형 성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나)
앞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 MBTI 유형을 알려주었다. 내 대답에 학생들은 아,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끝났다. 내 답변에 대한 어떤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알고 싶기만 한 모양이다. 알았으니 됐나보다.
여전히 내게 MBTI를 묻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대답을 하고 나면 "당신은 타인에게 공감을 잘 하지 못하고 위로에 서툴군요. 게으르고 무뚝뚝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대신 "아, 그렇군요" 하고 끝나버린다. 그래도 그걸 묻는 이유는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기 때문이겠지. 상대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을 객관식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꽤 재미있는 일 아닐까. 덧붙여 말하자면, 내 MBTI는 INTP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 그렇군요, 하고 끝나버릴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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