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엄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니 갑자기 가슴이 메어온다. 4형제 중에서 막내라 그런지 엄마를 더 의지하며 살았다. 산골 마을의 살림살이는 넉넉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에 엄마는 가끔 큰 그릇에 과일을 갖고 다니면서 행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농사를 지으면서 짬짬이 행상을 하며 부지런히 사셨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나 보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니 초등학교 6학년까지 엄마의 가슴을 만져야만 잠이 왔다. 엄마는 그렇게 막내를 가슴으로 안아서 키워 주셨다. 엄마에게는 돌아가실 때까지 막내아들이 아픈 손이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다. 신혼살림은 옥탑방에서 시작했다. 1년 뒤 반지하 전세를 얻어서 이사했다. 4년이 지난 후에 아파트를 분양받고 1997년 7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 그렇게 13년 동안 잘 살았다.
2007년 9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같이 학원을 하다가 2008년 7월 태국 치앙마이로 떠나면서 엄마의 아들에 대한 걱정은 다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변변치 않은 생활로 늘 걱정만 끼쳐 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2018년 가을 엄마가 거동이 불편하셔서 큰형이 시골에 내려가서 한 달을 직접 모셨다. 그러면서 직접 모시기에는 너무 힘들어 전문인의 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삼 형제가 상의해서 12월 요양원으로 모셨다. 부산에 살았지만, 가끔은 아이들과 같이 요양원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나와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와 케이크도 먹고 강변 산책도 하곤 했다. 엄마의 볼에 뽀뽀하면 빙긋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코로나가 발생한 이후에는 전혀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코로나가 가족을 생이별시켰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큰형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 요양병원에서 분당 차병원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서 가족 중 한 사람씩 문병을 허용해 준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참 오랫동안 엄마를 만나지 못했는데 엄마를 뵐 마음에 들떠 있었다. 주말에 엄마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8월 28일 점심때쯤 큰형이 전화가 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심폐소생술을 한다고 연락이 와서 병원에 간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포천에서 에어컨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내드리면 안 되는데, 주말에 엄마 보러 가기로 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일은 해야 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큰형이 울먹이면서 전화를 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단다. 일하다 말고 일하던 집 밖으로 나와 표시 나지 않게 엄청나게 울었다. 일을 다 끝내고 같이 일하시는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집에 도착했다. 장모님 병간호로 천안 단국대학교 병원에 가 있는 아내에게 연락했다. 바로 올라오겠단다. 아내가 올라오고 11시경 병원으로 갔다.
마지막 염을 하는 시간 화장한 엄마의 얼굴이 너무 예뻐 보였다. 볼에 뽀뽀도 하며 얼굴을 만지는데 이것이 이생에서 보는 마지막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 나중에 천국에서 봐요. 정말 사랑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매일신문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역 사회의 가족들을 위한 추모관 [그립습니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귀중한 사연을 전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서를 작성하시거나 연락처로 담당 기자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이메일: tong@imaeil.com
▷사연 신청 주소: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전화: 053-251-1580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