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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부민의 공포를 자아내던 신천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1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11일 자

'우기가 잦아질 때마다 부민의 공포를 자아내던 신천 제방이 드디어 개축되리라 한다. 그간 부에서도 전기 신천 제방 개축안에 대해서는 작추이래 설계까지 준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온 것이나 문제의 예산으로 지연되고 있던 중 지난 10일 정식으로 도당국으로부터 150만 원 예산을 받게 되어 근근 입찰에 부쳐~'(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11일 자)

신천은 왜 부민의 공포를 자아냈을까. 여름이면 수시로 닥치는 물난리 때문이었다. 1948년에는 6월에 수해가 났다. 같은 달 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간 쉴새 없이 비가 쏟아졌다. 신천의 수위가 4m를 넘어 대봉동과 신천동의 제방이 100m나 무너졌다. 5백여 호에 이르는 이재민들은 인근의 대구중과 경북중에 피신했다. 곳곳에 교통이 끊겨 생필품 공급도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신천뿐만 아니라 금호강 제방도 유실되었고 곳곳에서 인명피해도 속출했다.

신천의 수해 피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알려진 대로 이공제비의 송덕비가 세워진 이유 또한 신천의 물난리 때문이었다. 큰비가 내릴 때마다 물이 읍성 안으로 흘러들었다. 침수를 막으려 조선 정조 때인 1778년에 대구판관 이서가 사재를 털어 방천을 쌓았다. 이를 기리는 이공제비 옆에는 이범선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이서가 축조한 제방이 뒷날 무너지자 고종 1865년에 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범선이 수축해서 피해를 막았던 것이다.

해마다 비 피해가 반복되자 언론은 지역뉴스를 전하면서 '수해 많기로 유명한 경북도'로 시작하기 일쑤였다. 신천의 범람은 대구시민의 일상을 위협했다. 신천에 제방을 쌓아 비 피해를 막는 일이 반복됐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는 총공사비 30여만 원으로 신천의 상류인 상동에서 하류인 산격동까지 제방을 쌓았다. 동촌평야의 물난리를 막기 위해 금호강 호안공사도 함께 벌였다.

해방 후의 홍수 때는 쓰레기가 하수도를 막아 피해가 컸다는 논란도 벌어졌다. 그렇더라도 홍수를 막는 급선무는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예산 문제로 말만 무성했던 신천제방공사는 1948년 9월에 제방수축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 됐다. 총공사비 1억 원 가운데 5천만 원은 국고보조를 받고 나머지는 일반 부민에게 세금을 거둬 충당하기로 했다. 신천제방공사는 1년 가까운 공사 끝에 1950년 1월에 준공했다.

제방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신천은 본래의 풍경을 하나둘 드러냈다. 그중의 하나가 빨래터였다. 파동, 상동, 중동에서부터 아래로는 칠성시장 쪽이나 지금의 경대교, 성북교 밑이 빨래터였다. 신천물이 흐르는 곳 어디든 빨래터가 있었던 셈이다. 때가 많이 묻은 옷은 그 자리에서 솥을 걸고 삶고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옷을 빨았다. 아낙네들의 노동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스트레스를 풀고 소통하고 공감하는 공간으로는 적격이었다.

아낙네들이 터를 닦은 소통공간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신천은 차츰 대중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집회 장소로 인기를 끈 것은 접근성 때문이었다. 선거유세의 단골장소가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러니 신천둔지 허가를 둘러싸고 당국이 횡포를 부릴만했다. 1957년 12월에 민혁당은 정치강연회를 신천에서 열겠다고 하자 당국은 한겨울이었지만 제방(둔치)이 무너진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장마철에 툭하면 무너지던 신천은 빨래터와 집회광장을 거쳐 시민들이 쉽게 찾는 샛강이 되었다. 나아가 소통과 공감의 샛강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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