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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허 된 호텔, 켜켜이 쌓인 원한들…「대불호텔의 유령」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대불호텔 전시관 2층에 재현된 객실의 모습
대불호텔 전시관 2층에 재현된 객실의 모습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고딕풍으로 말하자면, 귀신 들린 집이 입주자를 고르듯 이 이야기가 당신을 선택할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풀이한다면 이 책을 펼쳐든 우리는 일단 '간택된' 독자다. 지난해 나온 하얀색 바탕의 소설집 '화이트호스'와 닮은꼴 표지로 출간된 장편소설, 강화길 작가의 '대불호텔의 유령'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펼친다.

으스스하고 싸한 제삿날의 냉기가 지배하던 단편 '음복'. 지난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작가에게 쥐어줬던 작품처럼 이번 소설도 제목 그대로다. 대불호텔이 배경인 소설이다. 지금은 없는 곳이다.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준공돼 국내 최초의 호텔로 알려진 곳이다. 왕궁이 있는 한성으로 향하던 외국인들이 하루 쉬어가는 곳이었다. 장시간 배를 타고 하선했더니 마차를 타고 또 하루를 가야 했으니 쉬어야하는 건 당연지사.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기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인천 중구의 중구생활사전시관에서나 옛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대불호텔의 옛 모습과 주변 사진. 사진 한가운데 보이는 다소 높은 건물이 대불호텔
대불호텔의 옛 모습과 주변 사진. 사진 한가운데 보이는 다소 높은 건물이 대불호텔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은 작가의 단편 '니꼴라 유치원'과 불가분의 관계다. '니꼴라 유치원'을 쓰고 있던 화자가 대불호텔을 찾는 액자 구조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니꼴라 유치원'은 강화길의 첫 소설집 '괜찮은 사람'에 수록된 작품이기도 해 독자는 곧바로 화자를 강화길 작가로 동일시하게 되는데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 속 화자, 그러니까 '니꼴라 유치원'를 쓰고 있었지만 그게 잘 써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던 소설가는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이 인천에 실존했던 대불호텔과 비슷하다는 엄마 친구 아들의 말을 듣고 서울과 인천을 잇는 지하철 1호선을 탄다. 엄마 친구 아들과 썸을 타고 있던 차에 양수겸장이었기도.

본격적인 소설의 배경은 대불호텔이 호텔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1955년쯤이다. 소설의 주요 인물은 지영현, 고연주, 뢰이한, 그리고 또 한 사람까지 4명이다. 소설은 프롤로그, 1, 2, 3부, 에필로그로 구성되는데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인 2부부터는 지영현이 화자로 나선다. 지영현은 대불호텔로 손님을 데려오면 인센티브를 받는, 호객행위를 담당하는 이다. 고연주는 말이 호텔이지 3층 건물의 일부를 숙박업소로 운영한 뒤 수익금으로 건물 주인에게 임차료를 내는 처지다.

셜리 잭슨
셜리 잭슨

그런 지영현 앞에 어느 날 독특한 손님이 나타난다. 외국인 남자와 여자다. 쉬어가라며 이끌어야하지만 영어가 짧아 영민하게 끌지 못하는데 글쎄 이들이 제 발로 호텔로 납신다. 설마, 설마… 셜리 잭슨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The Haunting of Hill House)'을 쓴 고딕호러 문학의 선구자 셜리 잭슨(1916~1965)이다.

강화길의 전작을 읽은 이들은 쾌재를 부른다. 편혜영의 장편소설 '홀'을 읽었다면 역시나 알 법한 셜리 잭슨. 잘 쓰인 스릴러 작품에게 주는 '셜리잭슨상'의 모델인 그가 대불호텔에서 묵는다니. 대놓고 유령, 환청, 데자뷔 등 기이한 체험에 셜리 잭슨이 시달리는 건 시간문제라는 예고다.

그도 그럴 것이 장화홍련 설화를 들은 바 있다며 극동아시아의 인천에 왔단다. 은근한 닭살 돌출에 공력을 보인 강화길 작가가 셜리 잭슨을 소설로 모셔온다니 누가 봐도 헌정 작품이다. 소설 각 챕터의 시작에 셜리 잭슨이 썼던, 혹은 관련 있는 문장들이 적혔다고 해서 셜리 잭슨의 등장을 예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셜리 잭슨도 사연은 있다. 호러 소설을 쓰던 셜리 잭슨은 흉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캘리포니아의 한 흉가를 알게 되는데 거긴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가 그 건물을 지을 때 배경이 있는데 그게 바로 대불호텔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의 한 호텔에서 '악'으로 가득한 건물을 경험했단 이야기다. 적어도 그 호텔을 직접 봐야하지 않겠냐는 의지를 품고, 발로 뛰는 작가 셜리 잭슨이 온 것이었다.

실제로 작품은 원한이 축적되는 과정을 하나씩 그려낸다.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를 묻는 혼돈 속에서 생긴 원한이 축적된다. 외국인, 더구나 청인으로 낙인찍혀 뭘 해도 되는 일이 없던 화교의 원한도 함께 쌓인다. 그런 원한은 어디선가 본 듯한 원한인데 작가는 장화홍련전을 들고 온다.

강화길 작가. 문학동네 제공
강화길 작가. 문학동네 제공

계모의 계략으로 억울하게 죽은 자매는 원혼이 되어 마을에 수령이 부임해 올 때마다 수령들은 놀라 죽어나간다. 억울한 죽음의 릴레이다. 누군가의 원한에 또 다른 원한이 된 셈이다. 자매의 원혼은 사라졌지만 수령의 집은 엉뚱하게 죽은 수령들의 원혼으로 다시 유령의 집이 된다. 악의, 원한, 지독한 원망, 없애려 해도 불어나고 불어나는 감정 덩어리가 된 집이다. 원한의 악순환이다.

어떤 스릴러 작품에든 식스센스급 대반전을 기대하는 게 독자와 관객과 시청자의 일치된 심리인데, 그걸로 작품의 평점을 매기곤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지영현이 평점을 올리고 내리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마련이다.

참고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1912년에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자사 창간 114주년에 맞춰 번역해 실었던 '황제 납치 프로젝트'(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다. 31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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