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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향토 조각의 토대를 닦은 홍성문 작가

조각가 홍성문(2005년 자택에서 촬영한 사진)
조각가 홍성문(2005년 자택에서 촬영한 사진)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대구 지역에서 열리는 수많은 전시회 중 조각 전시의 비중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각 개인전은 회화에 비해 월등히 적다. 돌이나 나무, 철 등 강한 재료를 사용해 조형물을 만드는 전통적인 조각의 경우,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육체적 노동의 강도가 상당하다. 때문에 어떤 재료를 선택하든 간에 새로운 조각 작품만으로 구성해서 한편의 전시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조각가의 이력을 살펴볼 때 개인전 횟수를 회화 작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구에서 활동하는 조각가들이 존경하는 작가 1순위로 꼽는, 대구 조각의 토대를 닦은 인물은 바로 조각가 고(故) 홍성문(1930~2014) 선생님이다. 홍성문 선생님은 한국현대조각 제2세대로, 대구 조각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중절모를 쓰고 전시장 한켠에 서 계신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는 제자들의 전시회 서문을 즐겨 써주기도 했지만 제자들의 전시장에 빠짐없이 나오는 것으로 격려를 대신하기도 했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대구 지역의 크고 작은 전시회장에서 빠짐없이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1954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김천중고등학교에 재직하다가 1963년 대구교육대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이후 대구교육대, 효성여대, 영남대 등에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5년 국전에 작품 '동양의 얼굴'이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에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입선과 특선, 문공부장관상 수상 등 국전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국문학 전공을 생각할 만큼 문학에도 심취했다. 네 권의 시집을 묶어 출간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조각에 뛰어들기 전이었던 1962년에는 경북문화상을 문학(시)부문에서 받았다. 그가 평생 지녀온 예술관은 '시와 조각은 별개가 아니고 표현수단이 다를 뿐이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 작품의 철학적 바탕이 '시'라고 했다.

그는 지역에서 조각이라는 장르가 정착되지 못했던 1960년대, 찬찬히 조각의 토대를 일구어 나갔다. '63미전', '이상회'와 같은 미술단체 조직에도 앞장섰고 1980년에는 순수 조각단체인 경북조각회를 창립했다. 1963년 열린 '63미전'은 대학 등지에서 강의를 하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든 그룹이었다. 당시 조각 작품을 출품한 사람은 홍성문 선생님이 유일했다. 출품작은 그 스스로가 '최초의 완성된 조각품'으로 꼽는 자소상(自塑像)으로, 1953년 대학 졸업 직전에 만든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 대구는 조각의 불모지였다. 1950년대 서양화가 주경이 조각 작품 몇 점을 선보인 적 있었고, 경주 출신 조각가 김만술이 대구 전시에 조각을 출품한 적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 1960~70년대부터 대구에 미술대학이 생겨나면서 조각이 확고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지역에서 '조각가'라는 수식어를 달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홍성문 선생님이 최초였다. 선생님은 주로 인체를 바탕으로 조형성을 실험했고, 나무, 철, 브론즈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인간애의 따뜻함을 표현했다.

그는 서양화가 신석필 등과 함께 1969년 '이상회' 그룹을 창립했다. '이(以)자와 상(象)'을 쓰자며 '이상회'라는 이름을 제안한 것도 홍성문 선생님이었다. '이상회'는 한자 뜻 그대로 '형상으로써, 형상으로부터'의 뜻을 가진 그룹 이름이다. 1980년에는 경북조각회를 창립했다. 경북조각회는 홍 선생님을 비롯해 박병영, 남철, 김익수, 정은기, 황태갑 등 지역의 조각가들과 힘을 모은 첫 그룹이었다.

작업실을 겸한 그의 자택을 처음 찾았던 것은 2000년대 초반 어느 봄이었다. 그는 남구 대명동의 조용한 주택가 자택에서 그와 그를 쏙 빼닮은 작품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조각 작품들이 가족처럼 닮아있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무뚝뚝한 입매와 매서운 눈매를 지닌 작가의 얼굴이 부드러운 곡선의 조각 작품과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과 나무를 수천 번, 수만 번 쓰다듬고 매만지는 과정에서 서로 닮아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2008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초대 회고전 때,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조각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노년의 육체가 감당하기에 힘이 들기 때문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말이었다. 오는 11월 12일부터 12월 1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한 전시 '시대의 선구자들'이다. 서동균, 주경, 최근배, 정점식, 홍성문 등 향토 미술의 토대를 닦은 작가들을 연구한 전시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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