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 이병직이 눈 쌓인 대나무를 그린 '설죽'이다. 이병직은 78세까지 장수한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미술컬렉터이자 자선가이다. 사군자를 주로 했던 이병직은 풍죽(風竹), 우죽(雨竹), 노죽(露竹), 청죽(晴竹), 대죽(大竹), 석죽(石竹), 총죽(叢竹), 죽림(竹林) 등 대나무를 다양하게 그렸지만 설죽은 드물다.
예서로 쓴 화제는 '주입배중영(酒入杯中影) 기첨국상성(棋添局上聲) 병인(丙寅) 하일(夏日) 송은생(松隱生)'으로 31세 때인 젊은 시절 그림이다.
화제는 대나무그림에 자주 보이는 당나라 때 시인 두순학의 '신재죽'(新栽竹) 중 두 구이다. 대나무를 새로 옮겨 심은 날 술상을 차려놓고 바둑 두는 광경을 읊었다. 대 그림자 어린 술잔을 들고 딱딱 바둑돌 놓는 소리가 고요한 대숲 옆에서 울리는 듯하다. 대나무그림은 그런 청복(淸福)의 운치와 어울리는 그림이다.
이병직은 해강 김규진에게 사군자와 서예를 배웠다. 김규진이 설립한 사설 미술학교인 서화연구회에 1915년 20세 때 입학해 그림과 글씨를 배운 제1회 졸업생이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사군자와 서예로 13차례 입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초대작가, 심사위원, 추천작가 등으로 참여했다.
이병직은 고미술에 취미가 있어 직접 사모았던 애호가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전 15권으로 호화롭게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고적도보'에 그의 소장품이 여러 점이 실려 있을 정도다. 30대의 나이인 1920년대부터 많은 명품을 소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붓을 잡아 본 서화가로서의 안목과 함께 대단한 재력을 가진 자산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20대에 이미 경성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이병직의 재산은 7천석 거부의 내관 집안인 양할아버지 유재현, 양아버지 유택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병직은 7세 때 사고로 고자가 돼 이 집안의 양자가 됐다. 궁중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다 1908년 무렵 내관제도가 없어지자 출궁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내시화가'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이병직은 애써 모았던 명품을 1937년과 1941년, 광복 후 1950년 등 세 차례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이 자금으로 1937년 고향인 경기도 양주에 효촌간이학교(현재 효촌초등학교)를 지을 땅과 건물을 기부했고, 1939년 양주중학교(현재 의정부고등학교) 설립기금으로 40만원의 거액을 내놓았으며, 이후에도 땅과 공사기금, 논 등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했다. 이병직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대나무처럼 꿋꿋하게 예술가로서, 명품을 소장한 컬렉터로서,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희사한 자선가로서 의미있는 인생을 살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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