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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허생이 은 50만 냥을 바다에 버린 까닭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입회장에서 트레이더들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입회장에서 트레이더들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해용 논설주간
김해용 논설주간

비록 가공의 인물이긴 하나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투자 귀재를 꼽자면 허생(許生)일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쓴 풍자소설 '허생전'의 주인공이다. 원래 허생은 책벌레였는데 "돈 벌어 오라"는 아내의 타박을 듣고는 한양 갑부에게서 1만 냥을 빌려 재테크에 나선다.

안성에서 과일을 싹쓸이해 10배 폭리를 취한 허생은 제주도로 건너가 말총을 다 사들여 또 10배를 번다. 두 차례 매점매석으로 원금의 100배를 번 셈이다. 기쁘냐는 시종의 말에 허생은 오히려 탄식을 한다. 고작 1만 냥만으로 흔들 수 있는 조선 경제의 취약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허생은 기근이 발생한 일본을 도와주고는 은(銀) 100만 냥을 받는다. 조선 최대 은광의 연간 생산량이 500냥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물량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허생은 은 50만 냥을 바다에 버린다. 막대한 은이 조선 경제를 뒤흔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국가의 실물 경제와 통화량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연암은 생각했던 듯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한 실학자답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힘은 막강하다. 경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나락에 빠뜨리기도 한다. 지금 세계 경제에 큰 걱정거리를 안기고 있는 미국발 금리 인상만 봐도 그렇다.

지금 세계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입을 주시하고 있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금융시장이 요동을 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3일 "선진국이 통화와 재정 긴축이라는 정책 노선을 빨리 바꾸지 않으면 세계는 불황과 장기 침체로 치달을 것"이라며 "특히 개발도상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라는 지적까지 했다.

2020년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이유로 무제한 양적 완화에 나섰다. 사상 유례없는 돈 풀기였다. 당시 많은 경제학자들이 우려를 했다. 미국의 돈 풀기가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허생의 심정과 같았을 수 있다. 우려대로 미국의 돈 풀기는 생산 부문이 아니라 금융과 자산 시장에 주로 흘러들었다. 너도나도 돈 빌려 집 사고 주식을 샀다. 정작 경제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한때 세간에는 '양털 깎기'라는 음모론이 횡행했다. 중국 경제학자 쑹훙빙이 저서 '화폐전쟁'을 통해 주장한 개념이다. 유대 자본가들이 돈 풀기와 조이기를 통해 거품을 키웠다가 터뜨리는 수법으로 주변국들의 부(富)를 반복적으로 약탈해 간다는 주장이다. 쑹훙빙은 그 대표적 사례로 1997년 대한민국 외환위기를 꼽았다.

유대 자본가가 막후에서 모든 것을 기획한다는 황당 주장을 빼면 쑹훙빙이 적시한 현상은 어느 정도 일어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대외 경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미국발 금리 인상 쇼크에 걱정이 여간 크지 않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발 금리 인상 드라이브로 아시아 국가의 외환위기 발발 가능성 있으며 그 가운데 한국과 태국이 유력하다는 전망까지 내놓은 판국이다.

기성세대는 외환위기의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생생히 기억한다. 퍼펙트 스톰이 밀려오고 있는데 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정치권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쟁과 권력 다툼에 정신이 팔려 있다. 못 미덥기는 정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협치 모습을 보기가 이리도 어려운 일인가. 정부와 여야 제발 정신 차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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