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공감의 배신자들

조두진 논설위원
조두진 논설위원

공감(共感)은 타인의 경험이나 아픔, 슬픔, 기쁨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공감력'은 긍정적 능력이지만 흉측한 이면이 존재한다. 내 편, 우리 편에 공감하기에 다른 편에 대단히 배타적이며, 공감력이 약한 사람보다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더 취약한 것이다. '공감의 역설'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같은 반 아이가 아끼는 물건을 훔쳤다고 치자. 부모는 "우리 아들이 그럴 리 없다"며 펄쩍 뛴다. 증거가 드러나면 "훔친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거나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줍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공감의 역설'은 정치인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심정은 이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의 명백한 범죄나 도덕적 잘못에 대해 국민이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하거나 '왜 그 사람만 털어 대나?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이 어디 있냐'며 범죄 혐의자, 범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스로 분별력이 있다는 사람들은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능력은 있잖아"라며 두둔한다. 규칙을 어긴 덕분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비리를 저질러 성과를 내고, 입시 부정으로 명문 대학에 합격한 것이 '능력'인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떻더라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내 편에 공감하느라 사회 파괴를 용인하는 셈이다. 그 좋은 공감 능력은 어째서 사회 전체에는 발휘되지 않고 정치인, 그것도 주로 나쁜 자들에게 발휘되는 것일까. 죄지은 자들에게 공감하느라 죄 없는 사람과 국가 시스템을 향해 드러내는 적의(敵意)는 얼마나 큰 사회적 피해인가.

누가 '공감의 배신자들'일까? ①이태원 참사의 책임은 백 퍼센트 인파가 북적대는 그 일대에 찾아간 사람들에게 있다. ②최측근이 구속되는 등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위기에 몰린 것은 그가 대선에서 패했기 때문이며, 수사는 정치 보복이다. 우리는 흔히 ①②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른 부류로 오인한다. 하지만 한쪽에만 공감하느라 팩트에 눈감고, 타인의 아픔과 사회적 피해를 외면한다는 점에서 ①②라고 믿는 사람들은 같은 부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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