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정이’

AI 전투 용병 개발 나선 미래 세계 이야기
한국적 정서 담은 SF 영화…모성애 담아내
호불호 갈리는 평 속 완성도 높은 CG 눈길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지난주 공개된 한 편의 영화가 호불호의 극을 달리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바로 연상호 감독의 SF 영화 '정이'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20일 저녁 한국 관객들의 혹평이 터지더니 급기야 "말아 먹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악을 달렸다. 그러나 개봉 이튿날부터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에 올랐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인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는 '정이'는 24일까지 사흘 연속 1위를 기록했다. 평가점수도 첫 날 685점으로 시작해 789점을 넘어 813점으로 점점 오르고 있다. 815점은 2위인 '글래스 어니언' 348점 보다 2배가 넘는 수치다. 왜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릴까.

'정이'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지구가 폐허가 되고 우주에 새로운 피난처인 쉘터를 만들어 이주한 미래 세계가 배경이다. 쉘터들끼리 수십 년 째 이어지는 내전에서 영웅이 탄생한다. 정이(김현주)는 수많은 작전에서 성공하지만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된다. 군수 개발회사 크로노이드는 그녀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AI(인공지능) 전투 용병을 개발하려고 한다.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정이'를 혹평하는 이들도 동의하는 것이 CG의 완성도다. '정이'의 세트와 의상, 액션 시퀀스는 흠잡을 데가 없다. 디스토피아 미래 지구에 대한 묘사도 잘 구현됐다. 문제는 서사다. AI 전투 용병을 개발하려는 군수회사와 이에 맞서는 주인공의 활약은 새로울 것이 없는 스토리이다. 거기에 등장인물들의 어색한 유머와 연기가 상투적이라 극에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 평점을 낮게 준 이들의 목소리다.

디스토피아 미래관을 가진 영화들의 설정들을 '정이'는 충실히 따르고 있다. 심지어 몇몇 장면들은 '블레이드 러너'(1982), '아이, 로봇'(2004) 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이'가 색다른 점은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이다. 정이의 딸 서현(강수연)이 엄마의 용병개발 프로젝트의 팀장이다. 엄마의 뇌가 군수회사에 판매된 지 39년 후, 딸이 매일 엄마를 만나 전투 시뮬레이션을 벌인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엄마를 만나는 느낌은 어떨까. 엄마는 왜 마지막 순간, 멈칫거리다가 총을 맞게 될까.

한국적 서정성을 신파로 몰아붙이는 이들이 많다. '정이' 또한 이런 신파에 익숙한 한국관객들의 시선에 그대로 노출됐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서사와 인물설정인 것이다.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

그러나 '정이'는 개봉 이튿날 미국 넷플릭스 영화 순위 1위에 올랐고 4일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이처럼 각광을 받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소재이면서 그들을 흡입시키는 힘이 바로 엄마와 딸이라는 한국적 정서 때문이다. 팔 다리가 잘린 엄마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는 딸의 모습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이다.

미국의 반응은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떠올리게 한다. '부산행'이 다분히 미국적인 소재인 좀비를 가져왔지만, 풀어가는 전개에 가족애를 녹여 넣어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정이'의 등장인물 또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 관객들이 가장 불편해 하는 것이 연구 소장인 상훈(류경수)의 어설픈 유머와 상투적인 대사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국어 대신 영어 더빙으로 보면 그나마 낫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상훈은 괴짜인 개발 회사의 대표가 만든 AI다. 자신의 말투와 생각, 유머 등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영화 초반만 보면 이런 '발연기'가 없지만, 후반에 가면 이해된다. 초반의 어색한 빌드업만 견디면 되지만 한국 관객은 견디기 어려운 조급함이 먼저 몰려온다. 감정이입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심오하지는 않지만 AI와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 영화에서 어색한 캐릭터들은 모두 AI라고 보면 된다. 반면에 인간인 서현은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대사가 없고 생각에 잠겨 있다.

인간성과 영혼의 물음 또한 깊게 던져준다. 정이가 마지막까지 발현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바로 인간성이다. 인간이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는 모성애를 영화가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차가운 메탈 갑옷을 입은 정이와 딸의 포옹신도 디스토피아 미래의 비극미와 그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서정성을 잘 그려내 주고 있다.

'정이'는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다. 그의 마지막을 영화로 애도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정이'의 매력이기도 하다. 정이를 연기한 김현주 배우의 호연도 좋다.

'정이'는 한국 SF영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기술적 성취도 뛰어나지만, 한국적 정서가 세계에 먹혀 드는 현장을 여실히 보여준 경우이기도 하다. 98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영화평론가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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