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12> ‘경주를 노래하다’

추억의 노래 속 천년을 살아 숨 쉬는 '마음의 고향'

불국사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장년층에게 경주를 떠올리게 하는 불쏘시개와 같은 장소다.

국수는 스님을 미소 짓게 한다는 의미로 불가에서 '승소'(僧笑)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국수가 언제부터 스님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송나라시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국수문화를 도입한 장본인이 '유학승'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라천년의 수도 경주에는 유난히 국수집이 많다. 시내는 물론이고 불국사 아랫동네에도 줄서야 먹을 수 있는 유명 국수식당이 여럿 있다.

신라와 동시대인 당나라에서는 국수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송나라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국수문화가 활짝 피면서 우리(고려)와 일본으로 국수제면기술이 전래됐다. 누구나 즐겨먹는 서민 음식으로 자리잡은 국수의 처지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스님이나 귀족·사대부들도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불국사'를 창건, 신라가 '부처의 땅', 佛國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공표할 정도로 불심에 심취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스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국수집이 성업중이라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잔치국수와 칼국수는 물론이고 6.25 전쟁으로 탄생한 밀면도 부산과 더불어 경주가 한 종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 같다. 통일신라말 왕경 '경주'는 사찰의 증가와 더불어 승려들의 수도 급증했다.

◆신라의 달밤

불국사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장년층에게 경주를 떠올리게 하는 불쏘시개와 같은 장소다. 지금처럼 불국사관광단지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은 불국사 아랫동네에 자리 잡은 오래된 단층 여관촌에 묵으면서 이른 새벽 '딩~~~딩~~'새벽예불을 알리는 불국사의 종소리가 울리던 불국사의 새벽을 기억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은 경주를 노래한 대중가요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노서동 고분군너머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다.

혹은 경주에서 유년을 보낸 경주사람들은 시내 고분군에 있는 '봉황대'에 있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종소리를 아침저녁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한 때 경주에서의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한 두 번 타종되기도 하던 성덕대왕 신종은 문화재보호를 위해 직접 타종하는 대신, 경주박물관에서 매시간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혹시라도 에밀레종이나 불국사의 종을 직접 타종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면 분황사에 가서 종을 타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선덕여왕의 절'인 분황사에서는 누구나 종을 타종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 다행이다.경주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련하게 고향을 떠올리는 영혼의 '오리진'으로 자리잡았다.

아 신라의 밤이여/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구나/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 화려한 천년 사직 간 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마 소리 귓가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신라의 달밤>은 경주를 노래한 대중가요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8.15 해방 직후인 1947년 가수 현인이 부른 이 노래는 해방의 기쁨을 경쾌한 리듬감으로 살려내면서 당대 최고의 대중가요로 우뚝 섰다.

불국사 대종

◆경주를 노래하라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저녁, '야경 핫플'로 자리 잡은 동궁이나 월성을 거니노라면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리는 환청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경주는 황룡사와 분황사, 불국사 뿐 아니라 도처에 부처를 모시는 사찰들로 가득한 '부처의 나라'였다. 눈을 뜨면 불국사의 종소리도 에밀레종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바세계지만, 눈을 감으면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신비스러운 신라의 종소리. 신라인들이 사바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극락정토가 경주였지 않을까 싶다.

노서동 고분군

신라초기 왕릉인 '대릉원'과 노서동 고분군 혹은 황룡사지나 월성을 거니노라면 마치 신라시대로 되돌아간 천년신라시대의 영화(榮華)는 물론 견훤의 후백제군사가 쳐들어와서 왕성을 노략질하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한 감상에 젖기도 한다. 첨성대와 안압지로 불리던 동궁의 은은한 불빛을 따라 걷다보면 '신라의 달밤'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경주에 간 어떤 날에는 마치 내가 신라의 장군이이었던 같은 기시감에 사로잡혀 낯익은 풍경처럼 경주에 남아있는 유적들이 친근감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노래는 그런 마력이 있다.경주에 다시 간다면 원로가수 현인버전의 <신라의 달밤>도 좋고 젊은 레트로 가수 조명섭 버전의 노래도 좋다. 보름달이 지는 저녁 시간 봄이 오는 길목의 요즘 경주는 시간여행하기 좋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처음 나온 대중가요 <마의태자>(이은상 작사, 안기영 작곡·노래)는 천년제국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산속으로 들어간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의 심경을 노래하면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면서 자주독립의 의지를 고취시켰다.

'그 나라 망하니 베옷을 감으시고/ 그 영화 버리니 풀뿌리 맛보셨네/ 애달프다 우리 태자 그 마음 뉘 알꼬/풍악산 험한 골에 한 품은 그 자취/ 지나는 길손마다 눈물을 지우네...'

'신라의 달밤' 노래비는 지금은 문을 닫은 '불국사역' 앞 공원에 조성돼 있다.

◆경주는 우리의 오리진

<신라의 달밤>이후 신라와 경주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신라 천년>(백일평)과 <신라의 북소리>(도미), <신라의 칼>(신세영) <신라제 길손>(백년설)등에 이어 이미자도 <님 그리운 망부석> 등이 그것이다.

<님 그리운 망부석>은 눌지왕 때 일본에 간 박제상을 그리워하다가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된 치술부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절절함을 노래했다.

'치술령 바위고개 밤마다 올라가서/ 망망한 허허바다 가신 님 불러보네/ 왕명을 어이하리 나라에 바친 그/ 어린 딸 삼 형제가 아버지를 찾는구나/ 치술령 바위고개 솔바람 불어오고 교교한 달빛만이 바다에 흐르는데/ 목메어 부르다가 쓰러질 이 목숨이 님 그린 일편단심 님 그린 일편단심/ 망부석이 되었구나'

신라 충신 박제상은 결국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아내와 세 딸도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새가 되고 망부석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1979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대학생가수 김주영은 문무대왕암을 소재로 한 경쾌란 리듬의 <대왕암>을 불러 금상을 수상하면서 죽어서도 바다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노래하기도 했다.

'모래성을 뭉개듯 남북 삼천리 황금투구 북소리 울리던 그날 그 큰 뜻에 하늘은 다시 맑았고/한 나라의 성업은 이룩됐어라/ 뭍으로 적을 막아 베이던 기개/ 죽는다고 내 나라를 모른다 하랴/ 마음 속에 또 하나 바다를 지켜 죽어서도 그 몸이 용이 됐어라/...뜨고 지는 태양을 지켜보시라...'

시인 박목월이 노래한 '모란여정'(牧丹餘情)은 간결한 시어로 경주를 노래한 시의 백미로 꼽힌다. 목월의 고향이 경주다.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仙桃山)/水晶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시 속의 선도산은 경주 오악 중 서악(西岳)으로 태종무열왕릉은 물론 수많은 불교유적들을 품고 있는 '서방정토'로 인식되면서 신성시되던 곳이다.

천년을 살아 숨 쉬는 경주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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