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올해만 사장님 3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대구 중구 약령시에서 약업사를 운영 중인 이모(62) 씨는 "약령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분들은 평균 78세로 나이가 많다. 장사도 잘 안되고 몸도 안 좋으니 점점 점포를 접는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대구 한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약령시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오랜 기간 한자리에서 세계적 한약재 유통의 거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홍보 부재, 백화점 입점 등의 이유로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약 관련 점포뿐만 아니라 관광객 부재도 심각한 수준이다. 약령시한의약박물관 관계자는 "코로나19 전에는 방문객이 1년에 10만명 정도 왔다. 많이 올 때는 1달에 1만명 넘게도 방문했는데, 지금은 코로나19가 끝났는데도 월 5천명 정도 찾아오고 있다. 국내 관광객보다 대만, 중국 단체 관광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 365년 역사를 가진 대구 약령시
현재 남성로와 동성로3가, 계산1·2가, 수동, 종로2가, 장관동, 상서동 일부를 포함하는 전장 715m의 도로변 중 한약 관계 점포가 밀집된 곳이 한방 특구인 약령시로 지정돼 있다.
약령시는 1658년(효종 9년) 무렵 한약재 수집의 효율성을 위한 국책사업의 하나로 1년 중 봄과 가을 1개월씩, 2번에 걸쳐 대구성 북문 근처의 객사 뜰에 개설됐다. 1908년 일제에 의해 대구성벽이 철거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약령시가 임금령으로 정식 장터로 인정받은 것은 1658년이지만 고려시대 때 편찬된 해동역사서에 따르면 사실상 같은 자리에 약전골목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뿌리부터 보면 1천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것이다.
약령시는 지난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에 국내 최고 약령시로 등재되기도 했다. 이어 2004년에는 한방 관련 분야 최초로 한방특구로 지정되며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방문객이 크게 줄고 한약 관련 점포도 급감하면서 한방특구 해제 위기까지 몰렸다. 지난해 1월 '지역특구법'(규제자유특구 및 지역특화발전특구에 관한 규제특례법) 개정에 따라 중소벤처기업부가 일부 특구를 주민공청회, 지역특구위원회 의결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지정 해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도 한방특구를 유지하기 위한 사업은 딱히 없는 실정이다. 한방특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방 관련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지만 약령시 축제 외에는 진행하는 사업이 없고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병식 약령시보존위원장은 "그동안 코로나19를 3년 동안 겪으면서 약령시 축제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대구시와, 대구한의대, 종합병원 등과 MOU를 체결해 활성화할 계획"이라며 "올해는 약령시 축제뿐 아니라 시에서 예산을 받아 간판 정비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백화점 입점·관프라 부족에 상권 쇠퇴
약령시는 해가 갈수록 상인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약업사 점포가 줄면서 상징성을 잃어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1년 약령시 앞쪽 대로변에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면서다.
백화점 입점 전인 2011년 약령시에서 영업했던 점포는 모두 375곳이었으나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현재 150곳이 채 되지 않는다. 12년간 폐점률은 60%에 달한다.
백화점 입점 후 백화점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안에 한약방과 무관한 카페, 레스토랑 등 백화점 유사 상권이 들어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50% 이상 올랐다. 상권이 축소하면서 관광객 발걸음은 점점 줄었고,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타격을 직격으로 맞으며 약령시를 떠나는 상인들도 많아졌다.
약령시보존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약령시 내 약업사 관련 근무자의 평균 연령은 78세, 한약재료 유통 업종 종사자는 평균 68세로 집계됐다. 올해 들어 4개월 동안 세상을 떠난 약업사 점주는 3명이나 된다.
약업사를 58년째 운영 중인 백모(80) 씨는 "내가 22살에 시집 올 때만 해도 약초꾼들이 지게를 지고 오면 사서 팔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집값도 많이 올랐고, 젊은 세대가 한약을 선호하지 않아 매출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점주들도 다 나처럼 나이도 많고 장사도 안되니 하나둘 약령시를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약령시 정비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약령시 관광객이 머무르고 소비할 수 있는 주차장, 상권 육성책 등 인프라와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양대석 전 약령시보존위원회 위원장은 "주차 공간이 부족하니 여행사가 관광버스를 갓길에 댔다가 단속 때문에 서둘러 돌아가고는 한다. 약령시에 와도 30분 정도 머무르는 게 고작이다. 대구시에 고성동 야구장을 빌리는 방안도 제시해 봤지만 진행되지 않았다"면서 "약령시를 보존하려면 민·관·학이 합쳐 10년에 걸친 중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적극적인 홍보와 대안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동현 국민의힘 대구 중구의원은 약령시 관련 예산은 대구시, 축제 주관은 약령시보존위원회, 한방특구 관련은 중구청이 담당하고 있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점을 지적했다. 김 의원은 "대구시와 중구청, 보존위원회, 한의학 전문가들을 초청해 약령시를 위한 협의체를 구상 중이다"고 말했다.
◆애물단지 된 '에코한방웰빙체험관'
약령시 경기 회복의 일환으로 '에코한방웰빙체험관'의 문화 공간으로의 변화가 주목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인다.
지난해 2월 중구청은 에코한방웰빙체험관에 대구를 대표하는 화가 이인성을 기리는 기념관을 조성해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 사업'을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유명 화백의 작품과 유품을 배치해 문화예술전시·체험의 관광지로 만들어 약령시에 활기를 되찾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이마저도 중구의회와의 관광 사업 예산으로 인한 갈등을 빚으며 진행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애초 중구청은 예산 35억원을 배정해 올해 1월에 개관하려고 했으나 중구의회는 사업의 타당성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특히 양측은 지난해 12월 283회 본회의에서 시에서 올라온 예산안 3천25억원 중 58억원을 삭감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다.
중구청은 또 지난달 20일 '이인성 아르스 공간 조성사업 기본계획'을 통해 총 사업비 35억 중 절반인 15억원을 특별교부금 등 국·시비로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중구청은 이달에 편성할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나 국비 확보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중구청 관계자는 "약령시 활성화를 위해 에코한방웰빙체험관 개관을 서두르려고 하고 있는데 예산 때문에 계획이 미뤄지고 있다"며 "이번 추경에 따라 약령시 축제를 비롯한 다른 사업 계획이 구체적으로 정해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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