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통일과 대북정책이 담긴 '2023년 통일백서'가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지난해까지 사용되었던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 대신 '북한 비핵화' 사용을 공식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의 용어는 1992년 평양에서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명시되어 정식 발효된 것으로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며, 온 겨레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자는 공통된 취지와 나아가 특히,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남한에 배치되었던 전술핵무기는 1991년 9월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철수가 발표되었고, 1991년 11월에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핵무기 부재를 선언하게 되었다.
손자병법 시계편의 난이취지(亂而取之)는 어지러우면 취한다는 뜻으로 이 책략은 적이 혼란한 상태를 틈타 공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지만, 적을 혼란시켜 기다렸다가 기회를 엿보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강이피지(强而避之)의 경우도 적이 너무 강하여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제기하고 있다.
한반도비핵화(조선반도비핵화)가 공식적인 행사에서 처음 등장된 시기는 1980년 10월 북한에서 개최된 제6차 조선로동당대회에서 김일성이가 처음으로 발언한 내용이었으며 그 후로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점을 미루어봤을 때 분명 다급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미국의 전술핵무기가 한반도에 처음 배치된 시기가 1958년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으로서는 핵공격의 공포감으로부터 국가 존폐의 갈림길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서는 '한반도 비핵화' 외에는 외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뾰족이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북한이 핵을 가져야겠다는 동기는 한국전쟁 때 트루먼 대통령이 중공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던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한이 핵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김일성으로서는 국가의 생존 문제로까지 대두되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렸다.
이러한 환경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핵 개발 프로그램을 멈추지 않고 진행시켰야 되는 상황이었으며,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핵 개발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집착은 이미 2차 세계대전을 매듭짓는 과정에서 미국의 핵무기 위력을 실감한 김일성은 무조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을 봤기 때문에 이후부터 핵무기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가지고 1947년부터 구소련의 기술원조를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핵위협에 직면한 북한은 체제를 지켜야하는 안보확보차원에서 1952년에는 원자력 연구협약을 체결하여 본격적으로 핵기술과 핵설비를 도입하여 1956년에 영변에 원자로를 설치하여 핵개발을 추진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제 공산 진영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중·소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분쟁으로 이어졌고, 소련과 중국의 격렬한 다툼은 1960년대 내내 대립이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자 이러한 대외적 환경은 북한의 외교 노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김일성은 중·소를 넘나들며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핵개발을 위한 기술을 최대한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북한은 중·소대립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급속히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나타내자 1960년대 후반 구소련은 정치적인 이유로 미사일 협력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중국에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등 미사일과 미사일 개발 기술 및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기반을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음으로써 미사일 개발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한국에 비해 북한의 경우는 중·소 사이에서 동맹관계 변수보다는 체제고수의 변수차원의 위협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시소게임 하듯 등거리외교를 펼치면서 동맹변수에 자국의 안보를 전부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 핵개발 정책결정과정에서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되었던 것이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1980∼90년대 동구 사회주의권이 전면적으로 해체되고 서독의 동독 흡수 통일, 소련과 중국이 사실상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우리와 수교를 맺는 상황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자체가 무너진 상황에 직면했고, 이러한 국가의 근본이념과 최고지도자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위협'에 직면하여 북한은 국가의 존폐차원에서 핵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1970년대 중반 핵 개발을 시도했을 때 미국이 얼마나 심한 압박을 가했는지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한국의 독자적 핵 개발 시도에 강한 불만을 일으키면서도 북핵 개발에 대해서는 제어하지 못한 채 핵 개발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미 행정부에서 추진한 대북정책 중에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든지 그 외에도 대북전략은 결국 북한이 핵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준 셈이고, 핵보유국을 선언할 수 있도록 했던 상황은 오롯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의 머리에 핵을 이고 살아야 하는 일촉즉발의 운명에 내몰렸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적을 속여 적의 병력을 약화시키거나 속임수로 내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적의 상황을 보고 적절히 행동하는 방법도 제시되었듯이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며 속으로는 핵무장을 완성시킨 북한의 화전양면전략의 위장평화공세에 놀아난 지난날을 반면교사 삼아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판단으로 발간된 2023년 통일백서에'한반도 비핵화'를'북한 비핵화'로 탈바꿈으로 제시된 것은 그나마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병욱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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