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견기업 장점 하나도 없다”…‘피터팬 증후군’ 앓는 대구 중견기업

‘중견기업 될라’ 직원 수 조절하고, 회사 분할하기도
“중견기업 되면 지원절벽, 꼭 중견기업 될 필요 있나”
지역경제 허리…“중견기업 지원 더욱 강화해야”

중소기업 대비 중견기업의 혜택이 거의 없어 중견기업이 되길 회피하는
중소기업 대비 중견기업의 혜택이 거의 없어 중견기업이 되길 회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여전히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낀 중견기업이 중소기업 회귀를 고민하고, 성장하는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되길 회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피터팬 증후군은 중소기업을 유지하면서 얻는 이득이 중견기업으로 편입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지난 3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견기업 특별법상 '시행 후 10년' 부칙을 삭제하는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번 개정으로 중견기업은 한시적인 개념을 벗어나 중소기업(중소기업기본법)과 함께 존재 근간이 되는 법률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법률적 진전에도 중견기업들이 느끼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역기업들은 "중견기업으로서 혜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이 없는 대구에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다시 대기업으로 가는 '성장 고리'를 만들기 위해선 중견기업 피터팬 증후군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견기업 되면 어쩌나" 고민하는 기업들

대구 자동차부품업체 A사는 지난해 매출액이 1조원이 넘는 지역의 대표적인 중견기업이다. 제조업은 매출액 기준 1천억원이 넘는 경우 중견기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매출액이 아닌 인원수로 분류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용보험법상 직원 수가 500인 이상이면 중견기업으로 분류되는데, A사 직원은 490명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직원 채용 수를 조금만 더 늘리면 인원수에서도 중견기업이 돼 인건비, 교육비 등 지원이 사라지게 된다.

A사 관계자는 "고용보험법상 지원이 사라진다고 해도 회사에 타격이 갈 정도는 아니지만, 중견기업이 된다고 해서 좋은 점도 없다"며 "인원이 늘면 지원도 늘어야 하는 게 맞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 낀 중견기업은 단점은 많고 장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대구 전자제품 업체 B사는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 약 650억원을 기록하면서 꾸준히 성장 중인 글로벌 업체다. 매출과 규모 면에서 '중견기업급'의 영향력을 자랑하지만, B사 역시 일부러 중견기업이 될 생각은 없다. 이미 B사는 해외사업부를 별도 법인으로 분할하는 등 중소기업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B사 관계자는 "중견기업이 되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 중견기업이 되면 예우가 다르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중소기업이라 하더라도 경쟁력만 있으면 이미지에 해가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며 "경영 측면에서도 굳이 덩치를 키우는 것보다 중소기업이 유리하다. 중견기업으로 가면 오히려 까다로운 점들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이노비즈협회 대구경북지회 관계자는 "대표적으로 연구개발(R&D) 지원사업만 봐도 중소기업은 자부담 비중이 10~20%인데 비해 중견기업은 50% 수준"이라며 "중견기업이 되면 받던 혜택이 없어지니 회사를 쪼개서라도 중소기업으로 남으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경북기계협동조합 관계자 또한 "중견기업 하나를 하는 것보다 분할을 통해 중소기업 여러 개를 운영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근로자 입장에선 회사가 쪼개진 상태에서 이 회사 저 회사를 번갈아가며 일하는 경우도 생긴다"며 "중견기업의 장점이 없으니 이런 편법이 발생하는 건데, 분명히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중견기업 진입 시 장점을 묻는 질문에 48.2%는 긍정적인 혜택이 없다고 답했다. 대구상의 제공
중견기업 진입 시 장점을 묻는 질문에 48.2%는 긍정적인 혜택이 없다고 답했다. 대구상의 제공

◆중견기업 '지원 절벽'…"장점은 없고 단점만"

기업들은 중견기업이 되면 좋은 점은 일부 인지도 상승 효과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마저도 요즘에는 마케팅 수단이 다양해 중소기업도 인지도를 높일 수단이 많아 중견기업의 장점은 상쇄된다.

반면 중소기업을 졸업하고 중견기업이 되면 세액공제나 세액감면, 정책자금, 인재 채용, 판로 확보 등 여러 측면에서 160여 개에 이르는 혜택이 사라진다. 반대급부로 새롭게 내야 하는 세금은 30여 종에 달한다. 자연히 중소기업계에선 일부러 이런 '지원 절벽'에 부딪힐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대구상공회의소가 지역 중견기업 122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대구 중견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 진입 시 장점을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 긍정적인 혜택이 없다고 응답한 기업이 절반(48.2%)에 육박했다.

아울러 해당 조사에서 10곳 중 1곳(10.8%)은 중소기업 회귀를 검토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귀 검토 요인은 조세 혜택 제외(68.0%)를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고, 금융지원 제외 (16.0%), 중소기업 적합업종 혜택 유지(12.0%), 기술개발 지원 제외(4.0%) 등의 순이었다. 현실적으로 중소기업 회귀가 불가능한 기업까지 합하면 중견기업 기피현상은 더욱 만연해 있다.

대구 화학제조업체 C사 관계자는 "중견기업이라 외국인 고용지정을 받지 못해 외국인 근로자를 뽑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외국인 고용허가제도는 중소 제조업(근로자 300인 미만 혹은 자본금 80억 이하)이나 농·축산업, 어업, 건설업, 일부 서비스업 등에만 허용된다. 이외에도 중견기업은 고용보험과 교육지원, 내일체움공제 등에서도 대부분 제외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자동차에 집중된 대구 중견기업

대구지역의 중견 제조업에서 자동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구상의에 따르면 대구 중견 제조업 중 자동차(53.3%)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반수를 넘었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기계장비(15.6%)나 1차금속(15.6%)이 주로 자동차 부품 생산과 관련된 산업인 점을 감안하면, 대구 중견기업의 '자동차 쏠림'은 더욱 심해진다.

대구는 주로 1차 협력업체인 중견기업들이 전기차 시대에 발맞춰 사업 전환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영세기업 대다수는 여력이 없는 상태다. 만약 자동차 산업의 위기가 오면 대구 중견기업은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다.

대구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지역 중견기업은 대부분 자동차부품 위주로 완성차 업체의 1차 협력업체로 구성돼 있다"며 "문제는 이들이 대기업 수준이 아니더라도 독자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 괜찮은데, 수직계열화된 구조를 쉽게 탈피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앞으로 자동차가 아닌 지식서비스산업 등 다른 업종에서도 계속해서 중견기업이 나와줘야 한다"며 "대구 산업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업종 간 건전한 경쟁이 활성화돼야 자연스럽게 중견기업이 살아나고 지역경제의 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이 지난 2월 정기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중견련은 2023년을 안정적인 중견기업 육성 법·제도 기반 구축 원년으로 선포했다. 중견련 제공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이 지난 2월 정기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중견련은 2023년을 안정적인 중견기업 육성 법·제도 기반 구축 원년으로 선포했다. 중견련 제공

◆'지역경제 허리'…"중견기업 지원 더욱 강화해야"

중견기업 특별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된 것을 계기로 중견기업 지원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역 경제계에선 그간 중견기업이 받는 대표적인 불이익인 가업상속공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가업승계란 기업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기업 소유권이나 경영권을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을 말한다. 세 부담이 크고 기업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100년 기업'이 탄생하려면 가업상속공제 완화가 필수라는 주장이다.

최근 정부는 이런 경제계 의견을 수렴, 가업상속공제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적용대상 중견기업 범위는 직전 3년 평균 매출액 4천억 미만 기업에서 5천억원 미만으로 완화됐다. 가업 영위기간에 따른 공제금액도 구간별로 100억원씩 증가해 한도가 최대 50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늘어났다. 이외에 사후관리 기간도 7년에서 5년으로 줄었고, 고용유지 요건도 완화됐다.

이종학 대구상의 사무처장은 "중견기업은 그간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체계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이번 가업상속공제 요건 완화가 잘 된 일이긴 하지만, 중견기업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 했다.

이재민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중견기업 피터팬 증후군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쉽지는 않겠지만 지역경제 허리인 중견기업 지원을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만큼 관련 논의가 계속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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