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17> 불국정토의 본산, 경주 남산

'천년제국' 시작과 끝에 함께한 남산…조선 '억불숭유'로 사라져 버린 佛頭
종교 활용 권력 교차 흔적 안타까움
독특한 구조 용장골 '석조여래좌상'…남산 시그니처 '용장사지 삼층석탑'
용장사 김시습 '금오신화' 집필한 곳

용장사는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용장사지 삼층석탑
용장사는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용장사지 삼층석탑

신라는 남산에서 시작해서 남산에서 끝났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 '나정'이 남산자락에 있고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사로잡힌 포석정도 남산자락이다. '동이 터서 솟아 오른 해가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새벌', '서라벌'이 삼국통일을 통해 '천년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산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산은 불국정토의 본산

경주 시가지를 독차지하다시피 한 대릉원 등의 수많은 왕릉과 불국사, 첨성대 등의 신라유적들이 경주를 경주답게 하고 있지만 남산을 보고 남산에 오르지 않고 경주를 온전히 알기는 어렵다. 서울의 남산보다는 조금 높은 산이지만 경주 남산은 성스러운 산이다. 삐뚤빼뚤 비틀어진 소나무가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남산에는 통일신라시대 한 때 100여 곳이 넘는 사찰이 온 산을 빽빽하게 차지할 정도로 '불국정토'의 본산이었다.

경주삼릉계석불좌상
경주삼릉계석불좌상

경주삼릉계석불좌상
경주삼릉계석불좌상

마치 중국의 불교성지 둔황석굴을 보는 듯 하다.

신라는 현세의 부처의 땅이라고 여겨졌다. 왕이 현세의 부처를 자처하면서 선덕(善德)이니 진덕(眞德), 헌덕(憲德), 성덕(聖德)이니 등의 법명을 차용했다.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립하고 불국사를 창건하고 석굴암을 창건, 부처를 모신 대역사(大役事)는 모두 불교라는 종교를 활용한 정치행위와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부처의 법력을 과시하던 통일신라의 시대도 고려도 몽골의 거듭된 침략 앞에선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동방 최고의 위용을 과시하던 황룡사 9층 목탑은 하루아침에 몽골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8만대장경의 법력도 소용이 없었다.

삼릉계곡에서 본 불두없는 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에서 본 불두없는 석조여래좌상

◆남산 불두없는 부처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나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경애왕릉이 있는 삼릉계곡을 통해 남산에 오르다가 가장 먼저 만나는 부처가 있다. 삼릉계 제1사지다. 계곡에 처박혀있던 부서진 불상이다. 단아한 불상은 어디로 가고 목 윗부분, 불두(佛頭)가 사라진 부처다. 제2사지를 조금 더 올라가면 다시 머리부위가 없는 불상을 만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안타까움에 저절로 두 손 모아 합장할 수 밖에. 한참을 더 올라 온전한 모습의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면서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삼릉계곡 왼쪽 능선에 자리 잡은 석조여래좌상은 불상의 몸과 머리 광배 및 대좌를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남산에서 불두없는 불상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천년의 시간이 지난만큼 여러 가지 연유가 있겠지만 조선시대 교조화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의 비극 탓일 게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귀족세력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불교를 억압하고 견제했다. 사대부를 주축세력으로 내세운 조선은 고려 귀족세력의 배후에 있던 불교를 부패의 본산으로 간주하고 성리학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 선봉에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아예 '불씨잡변'(佛氏雜辯)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불교를 억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숭유억불정책은 이처럼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체화되면서 조선 초기에는 국가가 사찰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고 승려도첩제를 시행, 승려를 관리통제하기도 했다.

삼릉 제1사지에서 만나는 이름없는 석불
삼릉 제1사지에서 만나는 이름없는 석불

남산에서 만난 목 잘린 부처는 상당수가 이런 조선초 숭유억불정책의 희생일 가능성이 높다. 종교를 활용한 권력의 욕망이 교차한 흔적이 안타까운 돌부처라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둔한 중생의 생각으로는 부처의 목을 치는 것으로도 불교를 없애는 것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자른 것은 돌덩이에 불과했고 요즘과 같이 교조화되고 종교화되기까지 한 진영논리였을 것이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산자락 곳곳에 남아있는 불사지(佛寺地) 122개소. 불상 57구 석탑 64기 석등 19기 불상대좌 11좌 귀부 또는 비석받침 5개 등이다.

광기의 10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겪은 중국에서도 이와 같이 교조화된 유물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수천 년의 시간을 이겨낸 문화유적들이 당시 파괴되거나 훼손됐고 곳곳의 불교와 유교성지들이 홍위병의 난동 희생양이 되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용장골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게 되는 불두없는 석조여래좌상은 부처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대좌로 인해 더 기억에 남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가해진 잔혹한 인간의 탐욕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눈에 밟힌다.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한 부처는 둥근 원반 모양의 돌을 삼층석탑마냥 쌓아 놓은 뒤 석조여래좌상을 반듯하게 올려놓은 형태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용장사지 삼층석탑

가까이 가서 찬찬히 둘러보면 기단으로 쓴 바위와 다를 바 없는 자연석을 다듬은 석조여래좌상이었다. 그저 돌덩이에 불과한 부처라 해도 머리 없는 불상은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은 피안의 극락세계를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 불상은 도굴꾼들이 사리를 찾으려고 무너뜨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불두가 언제 사라진 것인지, 훼손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훼손되고 도굴된 역사도 엄연히 살아있는 남산의 역사다. 계곡 어딘가에 사라진 불두가 뒹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남산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해발 400여m 남짓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용장계곡 꼭대기 바로 아래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석탑은 마치 용장계곡 전체를 지대석으로 삼은 것 마냥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를 자랑한다.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탑을 쌓은 것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작은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리라.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는 인간이지만 바벨탑이 아니라 산 위에 소박한 탑(塔) 하나 쌓는 것으로 부처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세속의 욕망을 가볍게 표출하려는 것이리라.

우리는 이 석탑을 통해 부처에 다가가려는 오묘한 감상에 젖는다. '내 마음 속 부처를 찾으라'는 고승의 선문에 애써 답하려 하는 것보다 그저 남산에 한 번 오르는 것만으로 부처를 만날 수 있는 셈이다. 부처의 땅, 불국토라 여겼던 신라인의 마음을 한 번쯤 느껴보고 싶다면 남산 계곡을 따라 한두 시간 오르내리는 것으로도 경주는 충분히 보답할 것이다.

용장골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게 되는 불두없는 석조여래좌상
용장골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게 되는 불두없는 석조여래좌상

◆금오설화와 김시습

부처의 땅이라고 하지만 남산에는 부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공존했다. 마음의 평안이 필요한 인간은 남산에 오르면서 바위에 새겨지고 반석위에 오롯이 좌정해있는 부처를 통해 위안을 얻고 현세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길은 세상의 번뇌를 만나고 고통을 체험하듯 가파르기도 하고 평온한 흙길이기도 하다. 가쁜 숨을 내려놓고 온전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신들의 세상이 바로 남산이었다.

용장사는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남산의 최고봉은 고위봉(494m)이지만 정상은 '금오봉'(468m)이다. 남산의 별칭이 금오산(金鰲山)이다. 남산을 금오산이라 부른 것은 당나라 시인 고운이 최치원에게 준 송별시(詩)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내 들으니 바다에 금 자라가 셋이 있어, 그 머리로 높고 낮은 산 이고 있다네. 그 산 위로 구슬 朱宮, 貝闕 黃金殿이 있고, 아래에는 천리만리 넓은 물결이라네. 그 곁에 한 점 계림이 푸른데, 금오산 정기로 뛰어한 인물을 낳게 했네.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 중국을 감동시켰네. 18세에 글 싸움 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을 쏘아 뚫었네!"

(삼국사기 권 46 최치원조)

매월당은 이 용장사에 7년 여간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가 머물던 조선시대에는 석탑과 석가여래좌상은 물론이고 용장사의 대웅전도, 부처도 온전하게 자리 잡고 중생을 계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산에 오를 때마다 종교적인 분위기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한 두 마디 말에도 현혹될 필요는 없다. 그저 남산에 가볍게 오를 수도 있고 용장사지 석탑을 보고 감동할 수도 있지만 멀찌감치 바라보면서 남산이 거기 존재한다는 것만 눈치 채기만 해도 된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