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된 공간과 먹이가 있을 때 개체 수가 증가하면 출산율이 감소하는 것은 오래전 동물 실험을 통해 자연계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극심한 경쟁에 치여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다 보면, 재생산 본능은 후순위로 밀리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지역에 보금자리를 틀게 하려면 먹거리(일자리)가 충분해야 한다. 하지만 지역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와 지역 기업들의 구직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일자리 미스매칭'에 지역 청년들은 타향 살이에 내몰린다.
서울행을 택한 청년들은 이내 암울한 현실을 맞이한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팍팍한 생활에 결혼을 삶의 선택지에서 제외해버린다. 비혼이 삶의 한 방식으로 떠오른 세태도 연애와 출산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결혼은 하더라도 출산은 별개라는 인식도 팽배해졌다.
◆"고향에서 자리 잡고 싶지만 일자리 없어"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고향에서 학업을 마친 김원준(가명·32) 씨. 그는 졸업 후 지역 한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다 2년 전 서울의 한 생활용품 관련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그에게 있어 서울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취업 사이트를 몇 개월씩 살펴봐도 고향에선 옛 회사보다 나은 커리어와 처우를 보장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직의 기쁨도 잠시였다. 서울에 올라가 살 곳을 알아보면서 원준 씨는 자신이 마치 '도시 하층민'으로 전락했다고 느꼈다. 그는 "욕실만 갖췄을 뿐, 방 한 칸 조차 따로 없는 원룸을 전세금 1억원대에도 못 구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며 "비교적 깔끔한 시설에, 역세권에 위치해 있고, 늦은 밤에도 다니기 안전한 집을 구하려면 억대 보증금은 기본이고, 여기에 100만~150만원에 달하는 월세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새 직장에서의 원준 씨의 월급은 300만원 남짓. 월급의 절반 이상이 월세, 공과금, 생활비로 사라지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최근 '서울에 태어나, 집에서 출·퇴근 하는 것만 해도 금수저'라는 주변의 푸념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론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원준 씨는 얼마 전부터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거나, 다시 수능 공부를 해 전공을 바꿔야 하는지 등의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 결혼은 물론 연애조차 그의 인생에선 '언감생심'이란 마음을 품은 지 오래다.
◆"결혼은 하더라도 출산은 별개"
내년 가을 2살 연상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정지은(가명·29) 씨. 지은 씨는 오래전부터 남자친구와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기로 약속했다.
둘 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다. 지은 씨는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서 영상 편집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계약직 신분이라 언제 퇴사하거나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처지다. 영화사에서 일하는 예비남편 역시 어떤 영화를 촬영하냐에 따라 수입이 달라진다.
출산을 한다고 해도, 육아는 또 다른 장벽이다.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맞벌이를 해야 할 텐데, 예비남편은 영화 촬영이 들어가면 몇 주 동안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연고가 지방이라, 양가에서 육아 도움은 사실상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지은 씨는 '딩크'(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 임을 주변에 알릴 때 듣는 각종 훈수들도 이제는 이골이 났다. '결혼은 해도 아이는 고민이다'는 말을 꺼내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면 결혼은 왜 하느냐' 등의 레퍼토리가 이어진다.
지은 씨는 "아이를 낳는 부부들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듯, 딩크 부부들도 개인들의 선택인데 굳이 토를 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초식남·건어물녀..."자만추도 피곤"
대구의 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이민정(가명·32) 씨는 살면서 독신주의자를 자처한 적은 결코 없다. 몇 차례 연애 경험도 있지만 서른을 넘어서면서 이성을 만나기 위한 모든 과정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떠올려 보면 밥벌이를 하기까지 끝이 없었던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어린 시절 일주일에 6, 7개에 달하는 학원 스케줄에서부터, 대학교와 전공 선택, 임용 지역 선택 등 부모님의 바람대로 엇나가지 않고 쉴 틈 없이 달려왔다.
민정 씨는 "직장 생활 6년 차인 지금에서야 안정적으로 내 한 몸을 건사하게 됐는데, 여기서 이성과의 관계를 굳이 추가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언젠가 연애 세포가 건어물처럼 바싹 말랐다는 '건어물녀'란 말을 듣고 나의 심경을 정말 잘 표현했다고 느꼈었다"고 말했다.
특히 맞벌이를 하며 두 자녀를 키우는 언니를 보면서 결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힘든 직장 생활에 더해 결혼을 한 뒤 생기는 의무, 그리고 자녀가 생긴 이후의 삶이 마치 또 다른 트랙의 출발선에 서야 하는 압박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민정 씨는 결혼 계획을 묻는 어른들에게 '나약하다', '이기적인 생각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 때면 늘 속으로 삼키는 말이 있다. 그는 "어른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인생 트랙'을 잘 따르느라 인생 전반에 번아웃이 왔고,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통한 연애도 버겁다"며 "젊은 친구들의 개성 있는 삶을 편견 없이 대해준다면 오히려 이성을 만날 여유도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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